미남배우 신성일의 근황과 폐암, 애인 김영애

2018. 10. 3. 22:18연예인 핫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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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일 폐암판정과 근황, 애인 김영애와의 스캔들

 

신성일 193758일생 나이 82

 

60~70년대에 우리나라 영화계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던 미남배우가 한명 있었지요. 바로 60~70년대를 대표하는 레전드급 청춘스타 신성일이랍니다.

 

신성일을 빼놓고는 우리나라 영화사를 논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오랫동안 수많은 영화에 출연해서, 큰 인기를 끌었던 당대의 톱스타였답니다.

 

60~70년대에 크게 히트했던 로맨스 영화에는 여지없이 신성일이 남자주인공으로 출연했고, 당시 신성일은 영화흥행을 위한 보증수표나 다름없었답니다.

 

1964년도에 만들어진 영화 맨발의 청춘의 대히트로 신성일은 단번에 스타덤에 올랐고, 그 후 남성적인 매력을 한껏 풍기는 반항적인 이미지의 트랜드가 되어 수많은 로맨스영화들에 출연하면서, 대중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끌었답니다.

 

1964년부터 1980년도까지는 신성일이 주연으로 출연한 영화들이 엄청난 인기를 끌면서, 흥행에 크게 성공했던 시대랍니다. 60, 70년대에 영화를 논할 때는 신성을 빼놓고는 결코 이야기를 할 수 없을 정도이지요.

 

맨발의 청춘’ ‘맨발로 뛰어라’ ‘불타는 청춘’ ‘청춘극장’ ‘초우’ ‘별들의 고향’ ‘겨울여자등 신성일은 당대에 크게 히트했던 수많은 청춘로맨스영화에 출연해서 멋지고 박력있는 카리스마를 선보이면서, 이 시기의 청춘 미남스타의 대명사가 불리워졌고, 수많은 여성들의 가슴을 설레이게 했답니다.

 

 

신성일이 출연한 영화들 제목에는 유독 청춘이라는 이름이 많이 들어가는데, 그의 잘생긴 외모와 반항적인 이미지가 청춘영화의 컨셉에 잘 맞았기 때문에,

은 감독들이 출중한 외모를 가진 그를 청춘영화의 대표적 아이돌로 키웠던 것이고, 이런 영화들이 60년대에 엄청난 대중적 인기를 끌었답니다.

 

그래서 신성일은 60, 70년대의 최고의 미남배우, 최고의 청춘스타라고 불리워졌던 것이지요. 당시 프랑스의 최고미남배우 아랑 드롱이 있었다면, 한국에는 한국판 아랑 드롱이랄 수 있는 신성일이 있었지요.

 

신성일이 일생동안 총 출연했던 영화가 무려 500편이나 된다고 하니, 정말 대단하지 않습니까? 500편 모두 신성일이 주인공으로 출연한 영화들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신성일은 60, 70년대 한국영화의 최고 청춘스타이자 산증인이라고 부른답니다. 이 당시 신성일의 인기와 인지도는 지금의 장동건을 능가한다고 볼 수 있지요.

 

오늘은 60~70년대에 최고의 미남스타로 불리웠던 신성일의 근황과 그동안 숨겨져왔던 비화들을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신성일은 60년대에 청춘영화에 많이 출연하면서, 새로운 인기남으로 급부상했는데, 유독 여배우 엄앵란과 영화를 많이 함께 찍었답니다.

60년대 초중반 신성일과 엄앵란은 함께 로맨스영화에 출연하면서 사랑을 싹틔워왔고, 결국 두사람은 1964년도에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워커힐호텔에서 이뤄진 두사람이 결혼식은 매우 성대하고도 호화롭게 치러졌으며, 당시 일반대중들이 수천명이 몰릴 정도로 대단히 큰 화제가 되었답니다.

  이렇게 결혼식을 올린 신성일과 엄앵란커플은 슬하에 12녀의 자녀를 낳아 기르면서 행복한 가정을 가꿔오게 됩니다.

 

그렇지만 겉으로는 순탄해 보였는 신성일과 엄앵란커플이었지만, 실제로는 두사람의 결혼생활에는 마찰과 갈등이 심했다고 합니다.

신성일과 엄앵란부부는 오랫동안 금슬좋은 잉꼬부부로 소문났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외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이미지메이킹이었다고 합니다.

 

실생활에서는 신성일과 엄앵란 사이에 갈등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 갈등의 원인이 대부분 신성일의 외도 때문이라고 합니다.

 

신성일은 스스로도 자신의 자서전에서 자신이 여러번 외도를 했었다고 고백을 했답니다.

 

신성일은 60~7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최고의 미남 청춘스타인데, 어떻게 외도가 한번도 없었겠습니까?

 

그런데 과연 신성일의 외도상대 여성은 누구인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있는데요.

당대의 최고 미남스터였던 신성일과 열애스캔들을 일으켰던 여성의 정체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답니다.

 

 

신성일과 애인 김영애의 외도, 불륜스캔들

 

신성일이 스스로 언급했던 외도사건은 1970년도에 일어났었지요. 당시 신성일은 청춘로맨스영화의 최고 히로인으로서, 뭇여성들의 엄청난 로망의 대상이었던 시기였답니다.

 

 

 

그렇지만 그에게는 부인 엄앵란과 토끼같은 자식들이 있었지요.

 

신성일은 영화동료들인 신영균, 윤일봉과 서로 호형호제하면서 친하게 지냈다고 합니다. 세 사람 모두 우리나라 영화계에서 거물급스타들이지요.

 

신성일은 이들 영화동료들과 함께 볼링이나 골프를 치러다니면서,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합니다.

어느날 세사람이 함께 모여 명동의 한 볼링장에서 볼링을 쳤습니다.

 

그런데 이들 세사람이 볼링을 치던 그 볼링장에 매우 아름다운 여성 한명이 들어왔는데, 그만 그 매력적인 여성에게 신성일이 첫눈에 반하고 말았답니다.

 

그여성은 당시 인기 아나운서였던 김영애였다고 합니다.

동아방송국에서 아나운서로 활동하고 있었던 김영애는 당시 휴직을 하고, 미국에 유학중이었습니다.

 

김영애는 미국에 유학을 하다가, 방학이 되어서 국내로 들어왔고, 모처럼 지인들과 볼링장을 찾았던 겁니다.

  김영애에게 필이 확 꽂힌 신성일은 볼링을 치던 중 김영애에게 슬며서 다가갔고, 데이트를 신청하면서 쪽지 한장을 건내고, 볼링장을 나왔다고 하네요.

 

 

그 당시 신성일은 영화 촬영에 들어갈 상황이었는데, 바로 다음날 부산으로 촬영로케를 떠날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신성일은 김영애에게 다가가서 자신이 내일부터 부산에 투숙하면서 영화촬영을 하게 되었으니, 내일 부산에 있는 자신의 호텔로 찾아오라고 요청을 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날 반신반의하고 있었던 신성일이었는데, 진짜로 그가 묶고있던 부산의 호텔로 김영애가 찾아왔다고 합니다. 이때부터 신성일과 김영애간의 로맨스가 시작된 것이랍니다.

 

당시 신성일은 부인 엄앵란과 자녀들이 있었지만, 신성일은 70년도 당시에는 최고의 청춘스타로서 뭇여성들로부터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있었던 시절이었기에, 신성일의 말 한마디에 아나운서 김영애는 그만 혹하고 빠져들어왔던 겁니다.

 

이 시기에 신성일과 김영애는 주로 미국등 외국에서 종종 만나서 연애를 했다고 합니다.

 

두사람 모두 대중들에게 워낙 잘 알려져있던 공인이었기 때문에, 국내에서 만나는 것은 제약이 많았고, 김영애가 유학 중인 미국등지에서 만나서 열애를 이어왔다고 합니다.

 

그런데 두사람의 연애에서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요부인 엄앵란 모르게 신성일이 김영애를 만나는 밀애는 2년간 은밀하게 이어져오게 됩니다.

 

 

그렇지만 뭐든지 꼬리가 길면 잡히게 되어 있지요. 신성일과 김영애가 미국등지에서 계속 연애를 이어갔는데, 미국의 교포들 대부분이 한국 최고 미남스타 신성일을 잘 알고 있었지요.

 

그래서 결국 미국의 친지들로부터 신성일과 김영애가 연애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져나오면서, 엄앵란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지요.

 

신성일이 1972년도에 미스코리아대회에 심사위원으로 참석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바로 그날이 애인 김영애가 유학생활을 끝내고, 국내로 들어오는 입국날이었답니다.

 

두사람은 사전에 김영애의 입국날에 축하연을 갖기로 굳게 약속한 상태였답니다.

그래서 신성일은 미스코리아대회가 끝나면 곧바로 김포공항으로 가서, 김영애를 만날 예정이었지요.

 

그런데 온갖 정보망을 총 동원해서, 두사람이 만난다는 사실을 엄앵란이 눈치챘다고 합니다.

엄앵란은 어떻게든 두사람이 만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묘안을 짜기에 이릅니다.

 

당시 신성일과 엄앵란은 어머니를 모시고 있었는데, 신성일은 어머니에 대한 효심이 무척 깊었다고 합니다.

 

엄앵란은 시어머니와 모시고 세사람이 저녁외식을 함께 할 것을 신성일에게 요구했고, 효심이 깊었던 신성일은 그 약속제의를 거절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엄앵란은 신성일 어머니를 모시고, 신성일이 심사를 보고있던 미스코리아대회 행사장에 함께 나와 있었답니다.

당시 애인 김영애와 만날 약속을 하고있었던 신성일은 부인 엄앵란과 어머니로부터 완전 포외되버린 상태였지요.

 

그리고 미스코리아대회가 끝났을 때에, 엄앵란과 어머니가 출입구문 앞에서 신성일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상황이었답니다.

 

애인 김영애의 귀국축하연 약속을 결코 저버릴 수 없었던 신성일은 진퇴양난의 상황에 빠져버렸답니다. 신성일은 행사장의 출입문 앞을 막고 기다리고 있는 엄앵란과 어머니에게 꼼짝없이 붙잡힐 상황이었지요.

 

그런데 행사가 끝나고 난후 신성일이 나오지 않자, 엄앵란이 신성일이 앉아있는 심사위원석쪽으로 다가갔답니다.

 

상황이 몹시 다급해진 신성일은 그만 미스코리아 무대 위로 뛰어올랐고, 무대를 가로질러서 무대뒤쪽으로 도망쳤다고 합니다.

당시 신성일이 갑자기 무대 위로 올라 뛰어달아나는 모습을 본 미스코리아미녀들이 깜짝놀라서 큰소리까지 지르는 등 잠시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답니다.

 

약속시간이 가까워지자, 다급해진 신성일은 엄앵란을 피하기 위해서, 무대 뒤쪽에 있는 작은 쪽문을 통해서 탈출을 시도했던 겁니다.

 

 

당대의 톱스타였던 신성일이 자신의 체면에도 불구하고, 미스코리아 무대위로 뛰어올라서 도망가는 모습은 정말 엄청난 해프닝이었고, 많은 관객들과 출연자들이 보면서 깜짝 놀랐다고 합니다.

 

이렇게 부인 엄앵란의 감시망으로부터 간신히 탈출한 신성일은 김포공항으로 가서, 애인 김영애를 만나서 회포를 풀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 당시 신성일이 무대위로 뛰어올라서, 수많은 미스코리아 미녀들 사이를 헤집고 달아나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이 정말 눈에 선하게 그려진답니다.

 

이렇게 2년 넘게 밀애를 계속해오던 두사람은 그만 결별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신성일과 김영애가 헤어지게 된 결정적인 이유는 김영애의 임신 때문이었다고 하네요.

 

비록 신성일이 부인 엄앵란을 놔두고 여러번 외도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적어도 신성일은 자신의 가정을 깰 생각은 없었다고 합니다. 

신성일은 몇 번의 바람을 피웠지만, 자신의 아내와 자식들을 끝까지 지킬 생각을 갖고있었던 겁니다.

 

70년대의 대부분의 남자들의 사고방식은 거의 다 이렇습니다. 그 당시는 보수적인 사회여서, 결코 자신의 가정만큼은 깨뜨리면 안된다는 관념이 강했습니다. 물론 지금은 전혀 달라졌지만 말이죠!

 

비록 외도를 한다고 하더라도 남자는 자신의 가정을 끝까지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이나 사명감을 갖고 있었답니다.

 

신성일은 몇 년 동안 김영애와의 밀애를 즐겼지만, 김영애가 덜컹 임신을 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그 다음부터 김영애를 전혀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이 지난 후에, 신성일과 김영애는 다시 연락이 이어졌고, 두사람은 프랑스 파리에서 마지막 만남을 가졌다고 합니다.

 

 

1년만에 다시 나타난 김영애는 얼굴이 무척 수축해있었다고 하며, 머리까지 빡빡 깎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녀는 신성일과 헤어지고 난 후 마음의 상심이 상당히 컸었다고 합니다.

 

이렇게 신성일은 파리에서 김영애와 마지막 회포를 푼 후에, 이별을 선언했고,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한참 시간이 흐른 1985년도에 신성일은 주변 지인으로부터 김영애가 미국에서 사망했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었다고 합니다. 김영애는 미국에서 교통사고를 당해서 사망했다고 합니다.

 

신성일은 과거의 애인 김영애가 죽었다는 이야기를 전해듣고는, 자신이 더 잘해줄 걸 그랬다고 말하면서, 무척 애석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신성일은 김영애 외에도 몇몇의 여자들과 또다른 외도를 했었다고 합니다.

 

사실 신성일이 엄연히 부인 엄앵란을 놔두고, 밖에서 외갓여자와 만난 것은 불륜을 저지른 것이어서 비난을 받아 마땅하지요.

 

그렇지만, 신성일은 60년대부터 시작해서 70년대, 그리고 80년대까지 수백편이 넘는 영화를 찍었던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 미남배우였습니다.

60, 70년대 신성일의 전성기에는 수많은 여성들이 신성일을 최고의 로망의 대상으로 삼았던 시절이었지요.

 

이렇게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당대의 톱스타가 부인 외에 전혀 바람을 피우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라고 할 수 있지요. 

신성일이 가만히 있더라도 아마 주변에서 여성들이 가만 놔두지 않았을 겁니다.

 

 

아뭏튼 신성일의 이런 외도 때문에, 부인 엄앵란은 마음고생이 무척 심했다고 합니다. 결국 신성일의 외도 때문에, 부인 엄앵란과 갈등이 생겨서 두사람은 별거를 했다고 합니다.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이지만, 신성일과 엄앵란은 1978년도부터 지금까지 무려 40년 동안 별거를 해왔다고 합니다.

곁으로는 그렇게 금슬좋은 잉꼬부부로 알려져왔던 두사람이 실제로는 40년간 별거생활을 해왔다니, 정말 놀라울 따름입니다.

 

신성일, 폐암 3기 판정받고 투병생활

 

그런데 최근에 신성일의 근황이 다시 알려졌는데, 신성일이 작년에 폐암 진단을 받았다고 하는 놀라운 소식이랍니다.

그렇게 건강해보였던 신성일이었는데, 작년 병원에서 진찰을 받은 결과, 그는 폐암 3기 판정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성일은 20176월경에 너무 심한 기침이 나면서, 입에서 핏덩어리를 쏟아냈다고 하며, 즉시 종합병원에 가서 종합검사를 받았는데, 그의 폐속에서 종양 한 개가 발견되었고, 폐암 3기 판정이 내려졌다고 합니다.

 

그후 신성일은 방사선치료와 항암치료를 계속 받아오고 있으며, 지금도 요양병원에서 지낸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기몸관리를 철저히 해왔던 신성일이 폐암 판정을 받았다는 것이어서, 가족들은 엄청난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신성일은 1982년도에 담배를 끊었고, 그후에는 일절 담배를 피우지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신성일은 종종 헬스장에 들러서 자신의 몸을 단련하는 등 몸관리를 철저하게 해왔다고 합니다.

그렇게 몸관리를 잘했던 신성일이 폐암판정을 받았으니, 매우 놀라운 일인데요.

 

 

그런데 신성일의 부친이 폐암으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결국 신성일이 폐암에 걸린 것은 유전적인 요인 때문이라고 할 수 있지요.

담배도 전혀 안피우고, 운동도 꾸준히 해온 신성일이 폐암에 걸린 이유는 유전 외에는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신성일은 나는 병에 질 정도로 약하지 않다, 반드시 폐암을 극복해 내갰다

강한 투병의지를 다짐하고 있습니다.

 

또한 신성일은 폐암3기라는 소식에 딸이 눈물을 흘리자, ‘울지마라, 나는 영화를 찍으면서 3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지만, 그래도 살아 남았어’ ‘나는 반드시 폐암을 이겨낼꺼야, 기적이 일어날꺼야!’라고 말하면서, 딸을 위로해주었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별거해왔던 엄앵란이 신성일의 병원에 달려와서, 신성일의 거액의 폐암치료비를 모두 계산해주었다고 합니다.

두사람이 오랫동안 별거생활을 해왔지만, 엄앵란과 신성일 사이에는 아무도 끊을 수 없는 매우 끈끈한 의리와 애정이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신성일은 작년부터 꾸준히 항암치료를 받아왔는데, 지금은 종양의 크기가 많이 작아졌다고 합니다.

정말 신성일의 말대로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거 같습니다. 신성일은 페암수술을 받았는데, 그 페암수술이 성공했다고 하네요.

 

폐암 3기 수준의 종양 크기가, 1기 수준의 크기로 작아졌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아직도 폐에 종양이 남아있으니, 계속해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합니다.

 

 

신성일의 폐질환이 개선되었다고 하니,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신성일은 발병한 후에 체중이 7kg이나 빠졌다고 합니다. 

엄앵란도 3년전에 유방암이 발생해서 치료를 받은 적이 있으며, 지금은 많이 나았다고 합니다.

 

60, 70년대에 한국을 대표하는 미남스타로서 한국영화계를 이끌어왔던 청춘스타 신성일이 폐암에 걸려 치료를 받고 있다는 안타까운 소식에 많은 국민들이 걱정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항상 밝고 긍정적으로 생활해왔던 신성일이 자신의 지병을 모두 극복해내고, 다시 예전의 활기찬 모습을 되찾았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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