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로 우미관 조선제일의 주먹 오야붕 김기환과 김두한의 관계, 싸움실력
2021. 9. 20. 21:50ㆍ사랑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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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최고의 주먹은 김기환인가, 김두한인가, 두 오야붕의 관계와 싸움실력
오늘은 일제시대를 거쳐 해방정국까지 우리나라의 종로 뒷골목을 휘어잡고 최고의 주먹으로 행세했던 김기환과 김두한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한다.
사람들은 30,40년대 우리나라의 최고의 주먹으로 보통 김두한을 꼽는다. 김두환이 약관 18세의 나이로 종로 우미관의 최고 보스자리에 올라서, 파워풀한 주먹과 엄청난 조직장악력으로 경성을 넘어 조선 8도의 주먹세계를 통일해서 소위 조선최고의 주먹으로 우뚝 솟아올랐던 전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엄밀히 말해서 원래 종로통의 최고오야붕은 김두한이 아니라 김기환이라는 주장이 강하게 대두되고 있다.
일제의 서슬퍼런 암울한 통치시대였던 1930년대에 종로통의 주먹세계를 장악했던 진정한 최고의 주먹은 누구인가, 김두한인가, 아니면 김기환인가?
오늘은 1930년대에 우리나라 최고의 금싸라기땅이었던 종로를 휘어잡으면서 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섰던 두 주역 김기환과 김두한의 관계에 대해서 소개해보려고 한다.
◆ 조선의 풍운아 주먹, 김기환
김기환은 원래 김두한 이전의 시절 또는 김두한과 비슷한 시기에 종로 최고의 주먹이라고 알려졌던 당대의 최고의 철권이었다.
그런데, 김두한이 등장하고 그가 종로의 헤게모니를 장악하면서, 김두한이름만 무성해지고, 김기환의 이름을 어느센가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나라 근현대사 주먹사에서는 김두한이 종로를 비롯한 경성 최고의 주먹으로 알려져왔지만, 일각에서는 오히려 김기환이야말로 진정한 경성 최고의 주먹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실정이다.
뛰어난 싸움실력과 배짱으로 수많은 야쿠자들과 주먹들을 쓰러뜨리고 종로통의 최고의 오야붕으로 우뚝 솟아올랐던 김두한이었지만, 그보다 한발 더 먼저 종로통을 휘어잡은 전설적인 주먹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김기환이었다.
김기환의 활약상을 먼저 설명해야 김두한에 대한 설명도 가능하기에, 먼저 김기환의 주먹활동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김기환은 초등학교와 중학교 학창시절 때에 몸이 단단하고 날렵해서 체조부 활동을 해왔다고 한다.
김기환은 학창시절부터 기계체조로 몸을 단련하여서 강인하고 탄탄한 체격을 갖고있었고, 어릴 때부터 담벼락을 샌드백 삼아서 두들기면서 주먹을 단련시켜 돌주먹을 만들었고, 이처럼 그는 선천적인 체격과 후천적인 운동으로 강력하고 유연한 체격을 갖추게 되었다.
김기환은 초등학교와 중학교시절에는 기계체조부 학생으로 활동하였는데, 유연한 몸으로 체조를 워낙 잘해서 ‘체조의 신동’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다.
김기환은 학교운동장에서 양손으로 잡지않고도 반대편지점까지 오직 덤블링만으로 왔다갔다 하는 초인적인 체조실력을 갖고 있었고, 이런 그의 뛰어난 묘기기술에 수많은 학생들이 매료되어 그의 팬덤까지 생길 정도였다.
김기환은 중학교 시절 기계체조 선수로 활동하면서 학생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었는데, 인기 좋은 김기환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던 일본학생들로부터 시기와 미움을 받게되고, 그들의 괴롭힘의 대상이 되고만다.
그런 시기에 전교 학생들의 우두머리이자 검도부장이었던 고 3학생 겐조로부터 한판 붙어보자는 도전장을 받게되는데, 당시 중학교 2학년인 김기환과 고등학교 3학년인 겐조 간에 말도안되는 한판 싸움이 벌어지게 된다.
나이나 덩치로 보더라도 한참 위인데다가 학교 최고의 싸움짱이었던 겐조와의 싸움을 선생과 주변학생들이 모두 말렸지만, 김기환으로서는 어차피 한판 붙을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김기환은 겐조가 내뻗는 주먹들을 이리저리 피하면서, 방어만 하며 소극적으로 임했지만, 어느 순간 겐조로부터 엄청 쎈 강펀치가 그의 얼굴에 적중되었고, 김기환은 코피를 흘리면서 수세에 몰리는 상황이 되었다.
그때부터 독기가 오르기 시작한 김기환은 겐조의 가슴팍으로 바짝 달라붙어 좌우양훅을 겐조의 양볼에 터뜨렸고, 양펀치를 맞고 휘청이는 겐조에게 김기환의 강력한 최후의 라이트펀치가 적중되었고, 그 라이트펀치를 맞은 겐조는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자신보다 훨씬 덩치가 큰 학교의 우두머리를 쓰러뜨린 이 싸움으로 한국학생들로부터 스타대접을 받았지만, 일본학생들과 학교측으로부터 김기환은 요주의인물로 낙인찍히게 되었는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김기환이 때려눕힌 겐조의 아버지는 조선총독부의 고위간부였다는 사실!
이 때문에, 아무런 잘못이 없고 정당방위를 한 김기환은 상급학생 폭력혐의를 받고, 퇴학처분까지 당하고 만다.
이렇게 학교에서 우두머리학생을 때려눕힌 후 퇴학까지 당한 김기환은 그 때부터 길거리를 유랑하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게 되었다.
그러던 16살이 되던 해에, 김기환은 종로 5가 개천가에서 서커스단의 공연을 보았고, 그곳에서 우연찮게도 한 싸움에 휘말리게 된다.
서커스단 입구에서 무단으로 입장해서 서커스구경을 하려고 한 일본인 유도부 두명과 서커스단 기도 한명 사이에 싸움이 벌어지려하고 있었다.
유도복을 걸친 두명의 일본인들이 무료로 서커스구경을 시도하다가 조선인 기도한테 발각되어서, 싸움이 벌어진 것인데, 평소 불의를 보면 못참는 성격을 가진 김기환이 이 싸움에 개입했다.
조선인기도와 싸움을 벌이던 두명의 일본인 중 한명이 싸움을 말리던 김기환에게 ‘조센징! 바가야로’라고 욕을 하면서, 김기환을 번쩍 들어올려 자신의 어깨 너머로 패대기쳐버린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일본 유도부 청년에게 잡혀 공중으로 집어던져진 김기환은 공중에서 공중회전을 하더니만, 사뿐히 땅바닥으로 내려앉는게 아닌가?
김기환은 일본인으로부터 공중으로 패대기쳐졌지만, 눈깜짝할 찰나의 순간에 공중제비를 돌면서 바닥에 안착하는 신기한 묘기를 선보였고, 구경하던 조선인들은 큰 환호성을 올렸다.
일본인이 다시 김기환에게 다가와 손으로 김기환의 목을 잡아 비틀려고 하는 순간, 김기환은 몸을 숙이면서 재빠르게 라이트주먹과 레트프주먹을 날려 그의 복부와 안면에 적중시켰고, 이 두방의 펀치를 맞은 일본인은 그대로 배를 움켜쥐면서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또 한명의 일본인이 씩씩거리면서 다가와 김기환의 턱을 항해 주먹을 날렸고, 그 주먹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김기환은 잠시 휘청이다가 이내 중심을 바로잡고,
뒤쪽으로 몇 걸음 후퇴하더니, 갑자기 공중으로 뛰어올라 내려오는 반동으로 그의 안면을 발로 세차게 걷어차 버렸다.
김기환의 강력한 공중 걷어차기를 정통으로 턱에 얻어맞은 일본인은 비틀거리다가 그대로 쓰러져 혼절하고 말았다.
김기환의 놀라운 싸움장면을 보고 있던 조선인들은 크게 환호하면서 박수갈채를 보냈고, 서커스단의 기도였던 조선인도 박수를 치면서 그를 크게 치하했다.
이 싸움을 계기로 기도주임의 눈에 들은 김기환은 곧바로 그 서커스단의 기도로 스카웃되었다.
김기환을 스카웃한 그 서커스단은 서울의 여러 지역들을 돌아다니면서 서커스공연을 펼쳤고, 김기환은 그 때마다 텃세를 부리면서 돈을 요구하는 동네양아치들을 상대로 싸움을 펼쳐서 그들을 무릎 꿀리거나, 쫒아버리는 등 기도로서 명성을 떨쳤다.
나이 19세 되면서 서커스단의 기도주임 자리를 물려받은 김기환은 서울의 각지역으로 공연을 옮겨다니면서, 대단한 주먹활동을 펼쳐서 김기환의 이름은 각지역의 뒷골목과 주먹세계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김기환은 서커스단내에서 자신이 직접 차력쇼를 선보이는 등 직접 무대에 나서기도 했고, 고난도 기술의 공중제비와 덤블링도 직접 보여주면서, 많은 관객들을 매료시키기도 했는데, 그는 아이러니하게도 기도와 서커스공연이라는 두가지 직업을 동시에 수행했다.
김기환은 이 시기에 샌드백을 달아놓고 주먹을 단련시키며, 동시에 태껸과 유도를 배워고 수련을 지속해서, 자신의 신체능력을 극대화시켰고, 어느 순간에 싸움의 고수가 되었다.
이렇게 서커스단 기도주임이자, 싸움짱으로 큰 활약을 펼친 김기환은 특히 서커스공연을 많이 했던 서대문지역에서 최고의 싸움짱으로 명성이 널리 퍼지게 됐고,
그 곳의 주먹들이 하나둘씩 그의 휘하로 몰려들면서, 김기환은 서커스단 안팍으로 40명의 동생들을 거느린 커다란 주먹조직을 거느리게 되었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거대한 주먹조직을 거느리게 된 김기환은 서커스단 기도는 동생들에게 물려주고, 자신은 서대문에서 여러 주먹들을 끌어모아 마관패라는 막강한 주먹조직을 결성했고, 서대문의 주먹실세로 우뚝 솟아올랐다.
이렇게 마관패의 오야붕으로 올라선 김기환은 어느날 천황의 신상을 보기위해 남산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김기환의 운명을 바꿔 놓을만한 중요한 인물들과 만나게 된다.
◆ 김기환, 신마적, 성익경과의 만남과 주선으로 권투선수로 출장
어느날 김기환 일행이 남산을 방문하였는데, 남산아래에 384계단이 있었고, 이 계단을 올라가야 산정상에 있는 천황의 신상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계단 아래에서 김기환은 웃옷을 벗어던지고, 물구나무서기 자세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보통사람도 그냥 발로 걸어올라가기도 엄청나게 힘든 384계단인데, 김기환은 물구나무선 상태에서 두손으로 한계단씩 짚어가면서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김기환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높은 계단이 남산 384계단을 물구나무선 상태로 두팔로 성큼성큼 올라가니, 주변으로 많은 구경꾼들이 모여들었고, 사람들은 일제히 커다란 탄성과 환호성을 쏟아냈다.
그런데, 그 환호하는 구경꾼 중에는 종로통의 주먹과 오야붕들이 함께 있었는데, 바로 종로의 뒷골목을 휘어잡고 있던 신마적과 구마적, 성익경, 돼지와 칠복이 등 기라성 같은 주먹들이 함께 있었다.
김기환이 물구나무 선채로 384개 계단을 끝까지 올라간 후, 쉬지도 않고, 다시 384계단을 내려오는 엄청난 괴력을 보여주자, 구경꾼들은 경악을 금치못하면서 일제히 환호성을 올렸다.
그리고 그 때에 구경꾼과 함께 김기환의 묘기를 보고있던 신마적과 성익경, 돼지와 칠복이 등 종로통의 주먹들도 함께 탄성을 부르짖으면서 크게 감탄해했다.
김기환의 묘기를 신기하게 생각하고 감탄했던 신마적과 구마적, 돼지와 칠복이, 성익경등은 김기환과 통성명을 하면서 그와 술자리를 마련해서 대화를 나누었고, 이때부터 김기환은 구마적, 신마적과는 서로 형님 아우 하는 관계로 발전했다.
이 자리에서 전직 권투선수 출신이자 현 YMCA 권투부코치로 있는 성익경은 김기환이 엄청난 괴력을 지닌 사나이라는 것을 알게되고, 그에게 권투선수가 될 것을 강력히 권유했다.
‘만일 김기환 같은 자가 권투선수가 된다면, 못돼도 동양챔피언은 충분히 될 수 있다고 !’ 말하면서 신마적을 비롯한 성익경 등은 김기환에게 권투선수가 될 것을 강하게 권유했다.
그리고 김기환은 이들 종로주먹들의 권유를 흔쾌히 받아들여서 권투선수가 되기로 하고, 신마적과 구마적 등 기라성 같은 주먹들의 허락 하에 YMCA 학생체육관을 내집 드나들 듯 드나들면서 권투 배우는 데에 전념했다.
원래 서커스단 출신이자, 서대문 마관패의 두목이었던 약관 20세의 김기환이 우연찮게도 종로주먹등과의 이런 인연으로 인해서 종로로 출입하게 되었고, 신마적이 장악하고 있는 YMCA를 신마적의 비호아래 자유자재로 드나들면서 권투 같은 격투기에 열중할 수 있었다.
갓 20살이었던 김기환은 이후 몇차례 권투시합 경기를 치를 기회를 얻었고, 그 때마다 치른 권투시합에서 그는 상대선수를 대부분 초반전에 KO시키는 등 우리나라 권투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또한 김기환은 동대문운동장 특설링에서 필리핀의 KO왕으로 명성이 자자한 흑인혼혈복서 보비 윌스과의 권투경기를 펼쳐서 시종일관 그를 장작패듯 두들겨팬 끝에, 10회전에 통쾌한 KO승을 거두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더 드높여만 갔다.
보비 윌스는 조선 최초의 선수권자였던 김정연선수를 ko시켜 죽음에 이르게 한 무서운 살인펀치의 소유자였다.
이렇게 김기환은 권투선수로서 승승장구하면서 스타로 떠오르자, 종로통의 구마적과 신마적, 김장훈, 돼지, 칠복이 등 자신보다 4~6살 더 많은 종로통의 기라성 같은 주먹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술잔을 주고받는 사이로까지 발전했고, 주먹계에 자신의 이름 석자를 당당히 올려놓으면서 화려하게 주먹계에 등장했다.
✦ 김기환, 동양극장의 보스 나종태와의 한판 대결
김기환이 서대문 마관패의 우두머리이자, 권투선수로 큰 인기를 끌면서 주먹계에도 큰 명성 떨치자, 그의 휘하로 많은 주먹들이 몰려들었고, 김기환의 주먹조직은 하루가 다르게 확장되고 있었다.
그러자, 김기환은 많이 늘어난 동생들을 먹여살리기 위해서, 더 큰 나와바리가 필요했다.
김기환이 첫 번째로 눈독을 들였던 곳은 광화문의 금싸라기땅이었던 동양극장이었다.
당시 주먹들의 가장 큰 소망은 돈과 권력을 함께 얻을 수 있는 극장의 기도부장 자리에 오르는 것이었다.
주먹으로서 극장의 기도부장 자리에 오르면, 자연히 부하주먹들도 많이 몰려들고, 조직을 운영할 만큼 탄탄한 자금줄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 당시 모든 주먹들은 그 지역의 최고 오야붕의 위치에 오를 수 있는 극장의 기도부장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최고의 소망이었고, 그 자리에 오르기 위해서 서로간에 온갖 각축을 다 벌였다.
당시 22살이었던 김기환은 서대문과 광화문의 중간지점에 위치한 동양극장의 기도부장 자리를 나종태라는 주먹이 차지하고 주먹부대를 운영하자, 나종태와 한판 대결을 펼치기 위해 부하들과 함께 동양극장으로 몰려갔다.
나종태는 원래 주먹도 강하지만 육척장신에다 풍채가 워낙 멋있어서 많은 주먹들이 동경하는 주먹이었고, 그는 휘하에 30명이 넘는 부하들을 이끌고 있어서, 단일 주먹조직으로서는 경성에서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서대문의 우두머리로 올라선 김기환과 충정로 동양극장의 오야붕인 나종태는 서로간의 나와바리가 겹쳐서, 운명적으로 서로 피할 수 없는 한판 승부를 벌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만일, 두 주먹조직 전체가 전투를 벌인다면, 엄청난 살상이 벌어질 것을 우려한 김기환은 동양극장으로 직접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나종태에게 일대일 맞대결을 제안했다.
40 대 30의 싸움을 펼친다면, 엄청난 불상사가 생길 우려가 있으므로, 양진영의 두목들이 서로 맞짱대결을 펼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라는 판단에서다.
두 오야붕이 일대일 대결을 펼쳐서, 승리한 자가 두 주먹조직의 모든 부대원들을 전부 자신의 휘하로 둔다는 조건이었다. 그리고 패배한 자는 깨끗이 패배를 시인하고, 먼 곳으로 망명을 간다는 조건이었다.
기골이 장대한 나종태가 두 팔을 벌여서 김기환을 잡으려고 다가가자, 스피드로 빠른 김기환이 위빙을 하면서 이리저리 피했고, 이내 김기환은 나종태의 가슴팍으로 파고들어가 강력한 좌우 양훅을 나종태의 양쪽 안면을 가격했고,
충격을 받은 나종태가 뒤로 물러서며 휘청거리자 김기환의 피스톤 같은 오른손 스트레이트펀치가 그의 복부를 정확히 관통하자, 나종태는 ‘욱’하면서 그대로 쓰러져버렸고, 두사람의 대결을 1분만에 나종태가 KO당하면서, 싱겁게 끝나고 말았다.
그리고 김기환은 그 여세를 몰아, 광화문과 왕십리의 주먹오야붕에게도 도전장을 내밀었는데, 겁을 집어먹은 광화문의 오야붕 민수는 김기환의 맞대결 제안을 회피하면서 기권패로 광화문의 헤게모니는 김기환에게 돌아갔고,
왕십리의 오야붕 김남산도 항복하면서 그곳의 헤게모니도 김기환에게 돌아갔다.
김기환은 싸움을 하지않고도 우름짱 만으로 광화문과 왕십리 두지역을 공짜로 무혈입성했다.
이로써, 김기환은 1933년 22살의 나이에 서대문과 충정로의 동양극장, 광화문, 왕십리까지 차지하는 거대 주먹조직의 오야붕이 되면서, 그의 명성이 점점 주먹세계로 넓게 퍼져나갔다.
그리고 그 해 가을경에, 주먹으로서 더욱 큰 자신감이 오른 김기환은 경성(서울)의 최고의 노른자위 땅인 종로통으로 관심이 쏠리고 있었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의 상권이 밀집한 종로지역은 최고의 금싸라기땅이었고, 이 곳을 장악한 주먹이 경성(서울) 최고의 주먹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경성 최고의 주먹은 곧바로 조선 최고의 주먹으로 인정받게 된다.
권투선수로서, 주먹으로서 승승장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대문과 충정로의 내로라하는 주먹들을 모두 쓰러뜨린 김기환은 더이상 무서울 것이 없었고,
자신의 실력이 한창 불을 뿜는 이 순간에 여기서 머물게 아니라, 여세를 몰아서 이참에 조선 최고의 오야붕 자리인 종로통을 손에 쥘 야망을 품게 되었다.
1933년도에 김기환은 종로로 진출했는데, 종로회관과 야시장을 관할하는 우두머리는 악명이 높은 거북이라는 이름의 오야붕이었다.
김기환은 먼저 거북이부대의 2인자와 3인자였던 김일엽과 역기에게 맞상대를 걸어서 그들을 모두 간단하게 제압하였고, 그들의 오야붕인 거북이가 자신의 도전을 받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종로회관 앞마당에서 김기환 대 거북이의 일대일 맞싸움이 벌여졌다. 거북이가 먼저 주먹을 날리자, 머리를 숙여 피한 김기환이 오른손 스트레이트에 이은 왼손 스트레이트 연타를 거북이의 안면에 꽂아넣자, 거북이는 충격을 받고 뒤로 물러서며 주춤거렸다.
그러자, 김기환이 앞으로 달려가면서 거북이의 복부에 강력한 오른손 어퍼컷을 찍고, 강력한 왼손훅을 거북이의 안면에 꽂아넣자, 충격을 받은 거북이는 그대로 고꾸라졌고, 완전히 실신하고 말았다.
싸움 5분도 채 안되어서, 김기환이 거북이를 상대로 완벽한 KO승을 거두고, 종로이정목 야시장의 헤게모니를 장악했다.
이제, 종로회관에서부터 야시장까지가 김기환부대의 나와바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제 김기환은 서대문과 충정로에서 광화문을 건너 종로 야시장까지 차지하면서, 그의 나와바리는 엄청나게 확장되었고, 그 누구도 함부로 도전할 수 없는 강력한 주먹조직의 오야붕이 되었다.
물론 이 시기에 그의 인접지역인 우미관과 종로2가 조선극장에는 구마적과 신마적, 돼지와 칠복이 등 또다른 기라성 같은 주먹들이 군웅할거하고 있었고,
관철동유흥가에는 번개부대가 관할하고 있었는데, 김기환이 종로이정목을 차지했는데도 불구하고, 인접지역의 오야붕들은 그에게 이렇다할 공격을 가하거나 도전하지 않았다.
이렇게 김기환이 서대문에서부터 종로 야시장까지 헤게모니를 차지했던 1933년도가 그의 최전성기 시대라고 할 수 있다.
서대문을 관할하던 김기환이 떡하니 종로의 한복판인 이정목의 야시장까지 차지하면서, 그곳의 오야붕들에게 엄청난 도발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선배주먹들이 이렇다할 반격을 하지않은 것은 아마도 그가 권투선수로서 유명한 스타로서 국위선양을 때문에, 다른 주먹들이 그에게만은 한수접고 들어간 것이 아닌가 한다.
1933년 말경, 김기환은 부하 김병수를 시켜서 금싸라기땅인 종로카바레를 공격했는데, 그곳의 오야붕인 회칼과 그의 부하들을 집단 공격해서, 그들을 일거에 쓰러뜨리고, 종로카바레를 접수해버렸다.
그리고 김기환은 그 이듬해인 1934년도에 김두한, 정진룡, 스기무라박, 아오끼, 망치, 김목, 김삼수 같은 내노라하는 강철주먹들을 대거 영입해서 세를 크게 불려나갔다.
이렇게 김기환의 세력이 크게 확장되어나가자, 당시 종로5가의 평화시장을 관할하고 있던 쌍칼은 김기환과의 대결 대신에 스스로 김기환에게 항복해왔고,
그는 자신보다 나이가 4살이나 어린 김기환을 오야붕으로 모시고, 상납금을 헌납한다는 조건으로 자신의 평화시장 자리를 그대로 유임 받을 수 있었다.
1935년도에 김기환의 주먹조직은 가장 크게 확대되었고, 더 이상 김기환조직에 맞설 만한 주먹조직이 경성에는 없는 상태였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부분이 있는데, 김기환의 선배이자 먼저 종로통의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던 구마적과 신마적 등 구주먹들은 왜 김기환의 종로진출을 가만히 두고만 보았을까?
김기환이 서대문에서부터 종로의 야시장, 평화시장까지 광대한 지역을 차지하면서, 종로의 오야붕으로, 조선 제일의 주먹의 위치까지 올라섰는데,
그의 선배격인 되는 구마적과 신마적이 그에게 이렇다할 반격을 하지않았다는 점이 상당한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 김기환 이전의 종로통의 주먹 판도
1935년도 당시 종로의 큰오야붕이라고 불리우던 인물들은 구마적과 신마적, 김기환이었는데, 김기환은 24살이었고, 신마적 엄동욱은 그보다 4살 많은 28살이었으며, 구마적은 30살이었다.
그리고 김두한은 김기환보다 6살 어린 18세였다.
1930년대 초반 당시 경성(서울)의 한복판인 종로의 주먹판도를 살펴보면, 우미관극장과 관철동은 원래 구마적의 관할지역이었고, YMCA 학생체육관과 종로2가는 신마적의 나와바리였으며,
조선극장 일대는 극장의 기도부장인 돼지와 칠복이가 나와바리로 삼고있었으며, 종로 5가의 평화시장은 쌍칼이라는 자가 관할하고 있었다.
또한 종로3가는 단성사의 기도부장인 김장훈이 버티고 있었는데, 김장훈은 당시 장사동마적이라는 닉네임을 갖고 있었다.
20년대 후반부터 30년대 초반까지 종로통의 최고의 주먹으로 명성을 떨쳤던 인물이 구마적 고희경인데,
구마적은 당시 자동차서비스센터에서 정비공으로 일하면서, 기술자가 고장난 바퀴를 교체하고 있을 동안 두 손으로 자동차의 앞체를 번쩍 들어올릴 정도로 엄청난 괴력을 가진 소유자이며, 기골이 장대한 소문난 장사였다.
구마적은 엄청난 괴력과 탁월한 싸움실력을 바탕으로 우미관과 관철동일대를 주름잡으면서, 뒷골목의 주먹들을 모조리 때려눕이고, 그 지역의 큰오야붕으로 부상했던 입지전적인 인물이었다.
그런데, 구마적에 도전했다가 구마적에게 필적할만한 실적을 세운 두명의 주먹들이 나타났고,
그들은 구마적과의 대결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보상으로 구마적으로부터 새로운 마적 칭호를 부여받게 된다.
그 중 한사람이 신마적인 엄동욱이었고, 다른 사람이 장사동 마적이라는 칭호를 부여받은 김장훈이었다.
학생패의 우두머리 엄동욱은 엔젤맥주홀에서 구마적과 시비가 붙어서 팔씨름대결을 펼쳐서 구마적을 제압했고, 그 공로로 구마적으로부터 새로운 마적이라는 의미로 ‘신마적’이라는 시호를 부여받았다.
또한 단성사 기도부장인 김장훈은 종로 3가 골목길에서 만난 구마적과 시비가 붙어서 씨름대결을 펼쳤는데,
김장훈이 힘이 천하장사였던 구마적을 두손으로 번쩍 들어올려 집어던져서 구마적을 쓰러뜨렸는데, 김장훈의 괴력에 놀란 구마적이 김장훈과 화해하면서 자신을 씨름으로 이긴 공로로 김장훈에게 '장사동마적'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이렇게 30년대 초반 종로통에는 구마적 뿐만 아니라, 신마적과 장사동마적 등 마적의 칭호를 가진 세명의 주먹들이 각자의 나와바리를 관할하면서, 때로는 서로 협력하면서 때로는 서로를 견제하면서 함께 종로의 3대 오야붕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런데, 33년도에 종로이정목으로 진출한 김기환이 야시장을 차지한데 이어서 극장 기도부장이었던 돼지와 칠복이를 때려눕히면서 조선극장을 차지하였고,
관철동 일대의 유흥가를 차지하였는데, 이것은 김기환이 구마적의 나와바리와 신마적의 나와바리 일부를 빼앗아간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런데, 그지역의 큰오야붕이었던 구마적과 신마적이 자신의 지역을 침범하는 김기환을 손보지않았다는 것은 최대의 미스테리라고 할 수 있다.
이 당시 김기환이 부하 80명 이상을 거느릴 정도 당시 경성에서 최대로 거대한 주먹조직을 거느렸기 때문에,
제아무리 큰오야붕인 구마적과 신마적이라고 하더라도, 규모면에서 이미 엄청나게 거대해진 김기환조직과 전쟁을 치르는 것은 중과부적이라고 생각하고, 스스로 싸움을 포기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서대문, 광화문에서부터 종로의 야시장과 조선극장과 관철동까지 점령하는 등 조선의 최고상권을 차지한 김기환은 이때부터 명실상부한 종로 최고의 오야붕이 되었고, 경성을 대표하는 최고의 주먹자리에까지 오르게 됐다.
그런데, 어느날 주먹황제로 부상한 김기환에게 예기치않은 불상사가 생겼고, 그로 인해 김기환은 주먹황제의 자리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자신의 주먹나와바리를 한껏 확장시키면서, 조선 제일의 주먹으로 급부상한 김기환이었지만, 그가 너무 자만했던 것일까? 김기환은 일생일대에 있어서 최대의 실수를 저지르고 만다.
◆ 김두한, 김기환의 후광으로 종로 최고의 주먹으로 등극
이 당시 김기환은 일본야쿠자들의 본거지인 충무로에서 술을 먹고 돌아오는 길에, 악랄하기로 소문난 가와사끼 일본형사와 다리위에서 마주쳤고,
그와 시비가 붙어 화가 치밀어 오른 김기환이 휘두른 주먹에 턱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가와사끼형사가 그대로 다리밑으로 떨어지면서 큰 부상을 입게 된다.
이 일본형사 폭행사건 때문에, 김기환에게 일본경시청의 체포령이 떨어졌고, 대대적인 지명수배를 당하게 된다.
과거에도 부하들의 폭행사건 때문에, 형무소를 들락거린 김기환은 이번 사건만큼은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엄청난 위기감을 느낀 나머지,
그는 부하들을 모두 모아놓은 자리에서, 김두한에게 오야붕의 전권을 물려주고, 자신은 심복 몇 명을 데리고 만주 봉천지역으로 피신을 떠나고 만다.
이 때가 1936년 경으로 알려졌는데, 김기환은 몇 년 동안 만주 봉천으로 피신한 후, 다시 경성으로 돌아와 체포되어 몇 년간 형무소에 옥고를 치르게 되었고,
이렇게 김기환이 형사폭행사건으로 피신생활과 형무소생활을 하는 동안, 김기환으로부터 오야붕의 바통을 물려받은 김두한은 경성을 넘어 조선 최고의 주먹으로 우뚝 솟아오르게 된다.
그렇다면 김기환은 다른 부하들도 있는데도 불구하고, 왜 주먹세계로 들어온 지 얼마 안된 한참 어린 김두한에게 오야붕 자리를 넘겨줬을까?
그것은 김두한의 주먹과 싸움실력이 다른 주먹과 달리 무척 강했고 대적할 사람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두한은 주먹만 강할 뿐 아니라, 두뇌회전이 빠르고 부하들로부터의 신망도 높고, 무엇보다 조직장악력이 뛰어나서, 김기환으로서 자신이 없는 사이에 자신의 대리인으로서 믿을 수 있는 적임자라고 판단한 듯 하다.
김두한은 1934년도에 구마적에 도전장을 던져서 3분도 안되는 짧은 시간에 그를 보기좋게 쓰러뜨려서 엄청난 파란을 불러일으켰다.
김두한은 17세의 나이에 종로의 최고 오야붕이라고 불리우던 구마적에게 도전 맞짱대결을 펼쳤다.
김두한은 종로통에서 김기환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김기환의 부하로 들어갔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김두한은 종로에서 김기환의 부하로 있으면서도 자체적인 소규모 주먹조직을 보유하고 있었는데, 일종의 별동대를 거느리고 있었다.
그런데, 김두한과 구마적 고희경이 활동하던 구역이 겹치기 때문에, 이들 간에 크고작은 문제들이 발생하곤 했다.
종로의 가장 큰 이권이었던 우미관극장의 기도부장이었던 구마적은 권력과 이권을 함께 손에 쥔 아무나 넘볼 수 없는 큰 오야붕이었다.
구마적이 자신이 관할하던 우미관극장에서 허락도 없이 기어들어와 밤에 잠을 자던 김두한 동생들을 두들겨패어서 내쫒았는데, 이 소식이 김두한의 귀에 들어갔다.
종로 뒷골목에서 자신의 소규모 주먹조직을 운영하면서, 장차 큰 오야붕이 될 소망을 품고있던 김두한은 구마적의 동생 구타사건이 일어나자, 오히려 이 사건을 구마적에게 도전장을 던질 수 있는 좋은 기회로 삼았다.
나약하고 힘없는 동생들을 때렸다는 이유를 명분으로 삼아 김두한 구마적에게 도전장을 던졌고, 우미관극장 앞 공터에서 김두한 대 구마적간의 일대일 맞대결이 펼쳐졌다.
자동차 앞부분을 들어올릴 정도로 엄청난 괴력을 지닌 구마적에 붙잡히면, 그것으로 싸움은 끝이 난다.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천하장사였던 구마적은 상대방을 붙잡아서 팔을 꺾어 뼈를 부러뜨려서 상대방을 병신으로 만든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
김두한을 붙잡으려고 구마적은 커다란 손을 뻗어왔고, 구마적의 공격에 뒤쪽으로 물러났던 김두한은 곧바로 공중으로 솟아올랐고, 동시에 오른발로 구마적의 가슴을 세차게 걷어찼다.
김두한의 공중발차기 공격을 받은 구마적은 잠시 바닥으로 무릎을 꿇었다. 그렇지만, 워낙 맷집이 뛰어났던 구마적은 곧바로 손을 털고 일어나서, 다시 김두한을 잡기위해 다가왔다.
그러자, 김두한은 쏜살같이 공중으로 도약하면서, 구마적의 안면을 양발차기로 가격했고, 정통으로 양발킥 공격을 당한 구마적은 ‘억’하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면서 그대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김두한의 절묘한 두 번의 발차기공격으로 남산만한 덩치를 가진 구마적은 공격 한번 못해보고, 그대로 실신 KO당하고 말았다.
김두한이 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우미관의 우두머리 구마적을 쓰러뜨렸다는 소식은 종로를 넘어 널리 알려졌고, 이 놀라운 소식은 김기환의 귀에도 들어갔다.
이 당시는 1934년경으로 김두한은 17살이고, 김두한에게 맞대결에서 패한 구마적은 29살인데, 12살이나 많은 주먹계의 대선배이자 종로통의 가장 큰 오야붕인 구마적을 김두한이 맞대결을 펼쳐 완벽하게 KO로 제압한 것이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935년도에 김기환은 일본형사를 두들겨팬 폭행사건으로 인해서, 경성을 떠날 수밖에 없었는데,
실력이 출중한 많은 동생들을 제쳐놓고, 김기환이 김두한에게 후계자자리를 물려준 것은 아마도 김두한이 종로통의 최고주먹 구마적을 쓰러뜨린 큰 업적을 세운 점을 높이 산 때문으로 보인다.
김두한은 원래 수표교다리밑에서 거지생활을 하다가, 우연히 종로로 굴러들어가 배회하다가 우미관극장에 취직하였고, 극장내에서 목판을 들쳐매고 다니며 과자를 파는 판매원이었다.
또한 영화가 끝나면 영화선전판을 몸에 들쳐매고 종로를 돌아다니면서 영화선전을 하는 영화선전원 노릇을 했던 사실상 우미관의 똘마니였다.
그런 김두한이 우미관 뒷골목에서 김기환 주먹부대로 편입된 후, 소규모 주먹조직을 만들어 중견 주먹으로 활동하다가 우미관의 오야붕 구마적에게 도전해 그를 쓰러뜨리면서 종로통의 거물급주먹으로 급성장했다.
그리고 1935년 종로 관철동에서 가장 큰 주먹조직을 거느렸던 주먹황제이자 당대의 오야붕 김기환이 일본경찰 폭행사건으로 만주로 망명을 떠나게 되었는데, 김두한은 운좋게도 그로부터 두목자리를 물려받아 종로의 새로운 오야붕으로 등극하게 됐다.
김기환의 오야붕자리를 계승한 김두한은 종로의 또다른 마적인 신마적에게 도전장을 던진다.
종로 뒷골목에서 두명의 황제가 존재할 수 없는 법! 종로통에서 최고의 오야붕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던 신마적을 꺾어야만 김두한 자신이 진정한 주먹황제로 인정받을 수 있는 법이다.
어느날 시라소니가 자신의 두 동생을 두들겨팬 사건이 발생하자, 김두한은 두 동생을 때린 신마적에게 동생들의 복수를 한다는 명목으로 신마적에게 쳐들어가서 일대일 맞대결을 신청했다.
관철동 뒷골목의 비너스맥주집 앞마당에서 김두한과 신마적의 맞대결이 펼쳐졌다.
김두한의 주특기는 앞으로 달려나가는 탄력을 이용해 공중으로 뛰어오르면서 차는 강력한 공중발차기이다.
김두한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가면서 공중으로 튀어올라 강력한 공중발차기로 신마적의 안면을 거세게 걷어찼다.
충격을 받은 신마적이 ‘욱’하면서 주저앉아, 김두한은 곧바로 자신의 왼발로 신마적의 가슴팍을 걷어찼다.
두 번의 공격을 받고 쓰러진 신마적이 간신히 일어나서 공격자세를 취하자, 김두한은 곧바로 오른발킥을 날려서 신마적의 복부를 거쎄게 걷어찼고, ‘악’하는 외마디 비명소리와 함께 신마적은 복부를 움켜잡고,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김두한의 절묘한 발차기 3번의 공격으로 경성 최고의 주먹으로 명성을 날렸던 신마적이 단한번의 공격도 못해보고, 처참하게 실신 KO패 당하고 말았다.
이렇게 김기환으로부터 종로 관철동의 오야붕자리를 물려받은 김두한은 구마적, 신마적 같은 베테랑 주먹들을 모두 쓰러뜨리고, 명실상부한 종로 최고의 주먹으로 우뚝 솟아오를 수 있었다.
그 후 김두한은 자신의 주먹조직을 크게 확장시켜서 종로를 넘어 왕십리, 서대문, 광화문, 영등포, 마포 등 서울의 대부분의 지역들을 장악해가면서 경성 최고의 주먹으로 발돋움하게 되며, 1940년도에는 조선 8도를 장악하면서 조선 최고의 주먹으로 등극하게 된다.
김두한이 이렇게 종로의 오야붕을 넘어 조선을 대표하는 조선 제일의 주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김기환의 후광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김기환이 먼저 장악했던 주먹조직은 고스란히 그대로 김두한에게 이전되었기 때문에, 김두한의 김기환의 후광으로 어렵지않고 조선 최고의 주먹으로 올라설 수 있었다.
김두한시절 이전에, 서대문과 광화문, 종로통을 호령하면서 파란만장한 주먹왕초의 삶을 살아온 김기환은 1949년 38세의 한창 나이에 그만 폐결핵에 걸려서 세상을 떠나고 만다.
병명은 폐결핵이었는데, 지금은 병원에서 고칠 수 있는 병이지만, 의술이 발달하지못했던 그 시절이었기에 폐결핵에 걸린 김기환은 38살의 젊은 나이에 김두한, 김동회 등 자신의 옛부하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안타깝게도 사망했다.
김두한이 보스가 되기 이전에 종로통에서는 김기환이 최고의 싸움짱이었고, 그 당시 주먹세계에서는 김기환을 ‘주먹황제’라고까지 부를 정도로 김기환의 위세는 대단했었다.
만일 김기환과 김두한이 서로 맞대결을 펼쳤다면, 그 누구도 승자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박빙의 승부가 펼쳐졌을 것이다.
김기환은 일본경찰에 구속되지만 않았더라도, 종로의 보스로서, 아니 경성최고의 오야붕으로서 오랫동안 군림해나갔을 것이고, 그렇다면 김두한이 종로의 오야붕으로 등극하기가 쉽지만을 않았을 것이다.
김두한을 제외하고는, 조선 최고의 주먹이라고 불리워졌던 김기환은 일본경찰 폭행사건으로 인해서 오랜시간 동안 형무소생활을 하는 바람에 - 거의 6년 동안 - 자신의 최고오야붕 자리를 김두한에게 빼앗기고만 정말 대단히 운이 없는 불행한 주먹이었다.
만일 김기환이 형무소에 가지않고 김두한과 종로최고의 오야붕자리를 놓고, 한판 겨루었다면, 과연 누가 이겼을까?
이 승부 예측은 김두한과 시라소니가 실제로 맞승부를 펼쳤다면, 누가 이겼을까 처럼 굉장히 판단하기 어려운 사항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특별한 사유로 인해, 일본경찰의 체포와 수감생활로 인해 김두한과 싸우지 않고서도 자신의 오야붕 자리를 넘겨준 김기환이야말로, 진정한 종로 아니 경성의 최고 주먹이라는 주장이 대두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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