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10. 16. 04:18ㆍ사랑방 이야기
단종의 누이 경혜공주의 삶과 죽음, 계유정난
조선시대에 왕실에서 태어나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아갔던 비운의 공주가 있었는데, 바로 ‘경혜공주’이다.
드라마 '공주의 남자'로도 방영되어서, 많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던 '경혜공주'는 조선시대 공주 중에 가장 슬프고 애절한 삶을 살아갔던 여인이었다.
조선시대에 고귀한 왕실가문에서 태어났지만, 가장 비극적인 삶을 살았던 ‘경혜공주’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경혜공주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한마디는 바로 ‘단종의 친누나’라는 사실이다.
단종의 친누나라는 사실을 보더라도, 경혜공주가 얼마나 비극적인 삶을 살아갔는지에 대해 충분히 짐작할 수 있으리라고 본다.
단종이 누구인가? 바로 세종대왕의 장남 문종의 아들로서, 문종의 뒤를 이어서 조선의 제6대 왕으로 등극했던 인물이다.
그리고 경혜공주는 문종의 친딸이자 단종의 친누나로서, 지체높은 왕실가문의 공주이다.
이렇게 문종의 뒤를 이어서, 새로운 왕이 된 단종을 동생으로 두고 있던 경혜공주는 외견상 행복했어야 했지만, 그녀는 평생을 살얼음판을 걷는 듯한 공포스럽고 비극적인 삶을 살아야만 했다.
왜냐하면 권력에 대한 야망이 높았던 숙부 수양대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단종과 그의 누이 경혜공주에게 숙부 수양대군이 있었다는 것은 가장 불행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야심만만한 숙부 수양대군에 의해서 엄청난 피바람이 몰아치게 되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의 뒤를 이어 왕이 된 문종에게 두명의 부인이 있었지만, 두 부인이 아들을 낳지못했고, 후궁이었던 세 번째부인을 왕비로 맞아들였는데, 그녀가 현덕왕비 권씨이다.
그리고 현덕왕비 권씨가 마침내 왕자를 생산해내었는데, 바로 단종을 낳아서 문종의 후사를 이어줬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귀한 세자를 낳았던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자마자, 곧바로 사망하고 말았다.
1442년 단종은 출생하자마자, 천금 같은 친어머니를 여의게 된 것인데, 이것은 단종에게는 나중에 닥칠 불행의 전조라고 할 수 있다.
나중에 부왕인 문종이 죽은 뒤에, 단종이 왕으로 즉위하고 난 뒤, 단종을 지켜줄 수 있는 확고한 백그러운드가 사라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종은 현덕왕후를 잃고 난 후에 더 이상 혼인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나중에 단종을 지켜줄 수 있는 대왕대비의 존재를 없앤 것이어서, 문종을 지켜줄 수 있는 왕실어르신의 부재를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뭏튼 문종은 출생한 후부터 고립무원의 매우 외로운 처지에서 자라나게 되었다.
그리고 단종이 더욱 위태로와진 것은 아버지인 문종이 왕이 된 지 2년 만에 사망했는데, 어머니에 이어 아버지마저 사망함으로써, 어린 단종을 지켜줄 수 있는 마지막 안전장치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아버지인 문종이 병으로 사망하자, 문종은 13살의 어린 나이에 왕으로 등극했지만, 그의 권자는 항상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단종의 주변에는 권력에 대한 야망이 컸던 숙부 수양대군이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여읜 13살의 문종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상대는 자신보다 7살 많은 친누나 경혜공주뿐이었다.
경혜공주는 동생 단종의 유일한 혈육이었기 때문에, 단종이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상대였고, 실제로 단종은 7살 많은 경혜공주를 친어머니처럼 따랐다고 한다.
단종의 친누나 경혜공주는 한양에서도 소문날 정도로 빼어난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던 미녀였다고 한다. 경혜공주는 15살 나이에 참판 정충경의 아들 순의대부 정종과 혼인해서, 궐밖에 나가 살았다.
한창 어머니에게 응석을 부릴 나이에 왕이된 어린 단종은 어머니의 따뜻한 정이 그리워, 종종 대궐밖에 사는 경혜공주의 집을 찾아가서 적적한 마음을 달랬다고 한다.
부모님을 모두 여읜 단종에게 경혜공주는 따뜻한 어머니 같은 존재감이었고, 단종의 유일한 정신적인 의지처였다.
호시탐탐 정권을 장악하려고 기회를 엿보던 야심만만한 수양대군은 1453년 11월 10일에 드디어 군사를 이끌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날도 어린 단종은 누나 경혜공주의 집에서 누나와 함께 있었는데, 느닷없이 수양대군이 부하 천명을 이끌고 그집을 찾아왔던 것이다.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은 자신의 가장 큰 정적인 김종서를 가장 먼저 살해했고, 자신의 정적들을 제거하기 위한 살생부를 만들었는데, 수양대군은 자신의 정적들을 모두 제거하기 위한 제가를 받기위해 단종을 찾아갔던 것이다.
무장군사 천명을 이끌고 단종 앞으로 나간 수양대군은 단종을 협박해서 제가를 받아냈고, 안평대군을 비롯한 황보인, 이양, 조극관 같은 수많은 고명대신들을 모두 척살했는데, 이들은 모두 수양대군의 정치적 라이벌들이었다.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김종서와 황보인, 안평대군이 합심해서 쿠데타를 일으키려고 하니, 그 역적들을 모두 처단해야 한다고 고변했지만,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김종서와 황보인, 안평대군은 오히려 나이 어린 단종을 보호해주었고, 호시탐탐 왕권을 노리는 수양대군을 견제했던 것이다.
즉,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은 단지 자신의 권력획득을 위해서, 자신과 정적관계인 고명대신들을 척살했던 것이다.
수양대군이 ‘계유정란’을 일으켜서 살해했던 살생부의 대신들은 모두 단종에게 충성을 다했던 단종의 후견세력들이었다.
이렇게 수양대군은 문종이 죽은 후, 1년도 채 되지않은 시기에 자신의 본성을 드러내면서, 고명대신들을 모두 죽임으로써, 나이어린 조카 단종의 후견세력들을 모조리 제거했던 것이다.
이때부터 단종과 그의 누나 정혜옹주의 비극적인 삶이 시작되게 되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모두 여의고, 오린 나이에 왕이 된 14세의 소년왕 단종은 시집간 누나 경혜공주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이었고, 유일한 의지처였다.
단종에게는 누나 경혜공주는 누나이면서, 동시에 어머니와도 같은 존재였고, 유일하게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어린 나이에 왕이된 단종은 권력이나 정사보다도 항교동에 있는 경혜공주의 집에 놀러가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고 낙이었을 것이다.
외롭고 답답한 구중궁궐 속에 갇힌 자신의 외로움을 달래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바로 누나 경혜공주였던 것이다.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집은 창덕궁 바로 앞에 있는 항교동에 있는 거대한 저택이었다.
단종이 이렇게 친누나를 만나 회포를 푸는 도중에, 포악한 숙부 수양대군은 천여명의 무장군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왔고, 자신의 보위세력인 고명대신 수십명을 죽일 것을 고변하면서, 제가해달라고 협박받는 상황이 되었다.
수양대군의 서슬 퍼런 협박에 못이겨 단종은 어쩔 수 없이 수양대군이 내민 살생부에 재가를 내리게 된다.
결국 수양대군은 단종에게 충성을 다하는 고명대신 김종서, 황보인등 단종의 후견세력 수십명을 모두 척살하였고, 스스로 영의정에 등극해서 조선의 정권을 완전 장악하였다.
수양대군은 자신의 또다른 정치적 라이벌인 동생 안평대군마저 반역자로 몰아서, 귀양을 보낸 뒤에 사사시켜 버렸다.
이렇게 계유정난을 일으킨 수양대군은 단종의 친위세력들을 모두 척살해버림으로써 단종을 외톨이로 만들어버렸고, 조정의 모든 요직은 자신과 자신의 부하들이 장악해버렸다.
조선의 정권과 병권을 모두 장악한 수양대군은 또다시 자신의 야심을 드러내기 시작했는데, 어린 조카 단종을 상왕으로 만들고, 자신은 조선의 국왕으로 등극하였다.
외형적으로는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양위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사실상 단종을 겁박해서 반강제로 왕위를 탈취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만약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양위를 하지않았다면, 단종은 틀림없이 수양대군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따라서 단종의 양위는 단종 스스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취한 행동이었다.
이로써, 수양대군은 조카를 몰아내고 명실상부한 조선의 국왕 즉, 세조가 된 것이다.
이제는 더 이상 단종을 지켜줄 수 있는 후견세력이 거의 사라진 상황이어서, 실권없는 상왕이 된 단종은 바람 앞에 촛불 같은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세종대왕의 또다른 아들인 금성대군이 단종을 감싸주면서 수양대군에게 비판을 가하면서 반기를 들었다.
조정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수양대군은 눈에 가시같은 금성대군을 역적의 누명을 씌워서 유배를 보내버렸는데, 마침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이 금성대군과 정치적으로 가까웠던 동지였기에, 정종마저 유배를 당하는 처지가 되어버렸다.
계유정난으로 인해서, 단종은 실권없는 상왕으로 물러났고,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의 남편 정종은 유배를 당하는 등 남매 모두가 불행한 처지가 되어버렸다.
여기서 정혜공주의 남편 이름은 정종(鄭悰)인데, 이는 왕의 시호가 아니라, 그냥 남편의 이름이다.
사실 정혜공주의 남편 정종은 역모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인물이었는데, 금성대군이 역모죄로 처벌받는 상황에서, 금성대군과 친하다는 이유만으로 금성대군의 역모에 연루되어 억울한 귀양살이를 하게된 것이다.
정혜공주의 남편 정종은 처음에는 경기도 양근으로 귀양을 갔고, 그 이후 또다시 벌어진 사육신의 단종복위 사건에 또다시 연류되고 형이 가중되어서, 다시 광주로 귀양을 가게 됐다.
이 때가 1455년도인데, 경혜공주는 나이 21살의 꽃다운 나이였던 이 시절에, 남편은 먼곳으로 귀양을 당하는 처지가 되었고, 동생 단종은 왕위를 양위당하는 일까지 당해서, 경혜공주에게는 가장 불행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단종의 나이는 14살, 경혜공주의 나이는 21살, 두 남매는 꽃다운 이 시기에 너무도 소중한 것들을 많이 잃어버렸고,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생명을 위협받는 위태로운 상황에 처하게 됐다.
하나뿐인 동생은 왕권을 찬탈당하고 남편은 역모죄로 누명쓰고 귀양가게 된 상황에서, 경혜공주는 스스로 아무것도 해볼 수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에 처하게 된 경혜공주는 병에 걸려 병석에 눕는 처지가 된다.
이렇게 병석에 눕게된 경혜공주는 뜻밖에 용기를 내어, 자신이 중병을 앓고 누웠다는 소식을 수양대군에게 알렸다고 한다.
자신을 불행하게 만든 장본인인 수양대군에게 경혜공주가 자신의 와병사실을 알린 것은, 수양대군에게 마지막 시위를 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경혜공주의 입장에서는 더 이상 달아날 수도 없는 막다른 골목에 처한 상황에서, 마지막으로 수양대군에게 강력한 수를 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정치적으로는 정적의 관계였지만, 경혜공주도 명색이 세종대왕의 손녀이자 문종의 하나뿐인 고명딸인데, 그녀가 중병에 걸려서 죽거나, 자살이라도 하면, 세조(수양대군)에게는 가장 큰 이미지의 실추를 불러올 수 있고, 민심 또한 크게 이반될 수 있는 상황이었다.
경혜공주의 와병소식을 들은 수양대군은 강원도 영월로 유배보냈던 정종을 도성에서 가까운 경기도 양근으로 불러들였고, 그 후 다시 그의 유배를 풀어주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변덕이 왔다갔다 하는 세조는 다시 정종을 다시 전라도 광주로 유배보내 버렸다.
이 당시 경혜공주는 세조(수양대군)에게 상소를 올려서, 자신도 남편 정종과 함께 유배지로 갈 수 있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세조는 인정을 베풀어서 경혜공주가 남편을 따라가도록 허락해주었을 뿐만아니라, 여러 가지 필요한 식량까지 보내주었다고 한다.
그렇게 포악하고 인정사정 없던 세조가 경혜공주에게는 너그럽게 인정을 베풀어준 것이다.
또한 세조는 경혜공주가 서울로 다시 상경할 경우에는, 모든 필요한 물품들을 지원을 해주겠다는 약속도 해주었다고 한다.
이처럼 세조가 뜻밖의 경혜공주에게 호의를 베풀어준 이유는 악한 군주라는 자신의 이미지를 개선시킬 필요가 있었고, 엄청난 피의 숙청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가라앉힐 필요가 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실제로 세조는 단종을 죽인 후에, 여러 지역들을 순행하면서 백성들의 삶을 살폈다고 한다.
유혈쿠테타로 왕권을 찬탈했던 세조(수양대군)는 조카를 쫒아내고 왕위를 찬탈했다는 자신의 업보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었기 때문에, 백성들에게만큼은 폭군이 아닌 성군의 이미지로 각인되기를 바랬던 것이다.
그리고 1456년 사육신사건 때에 더욱 무서운 후폭풍이 이들 남매에게 휘몰아치게 된다.
1456년,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 이개, 유성원, 유응부 등 사육신이 주축이 되어서, 단종을 다시 왕으로 복위시키려는 ‘단종복위운동’을 계획하였다.
그런데 세조와 세자를 죽이기로 한 ‘단종복위’ 쿠데타는 김질의 배신으로 모든 계획이 들통났고, 쿠데타 주동자들인 사육신을 비롯한 가담자들 수십명이 엄청난 고문을 당한 후에, 죽임을 당하였다.
이 사육신사건은 단종을 복위하려는 충신들의 마지막 몸부림이었지만, 결국 실패로 끝남으로서, 오히려 단종과 누나 경혜공주를 더욱 비참한 신세로 몰아넣게 되었다.
‘단종복위’ 쿠테타에 엄청나게 분개한 세조(수양대군)은 그동안의 아량을 버리고 단종과 경혜공주를 더 강하게 핍박했고, 탄압했다.
결국 단종은 상왕직위에서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강원도 영월로 유배를 당한 후에, 결국 죽임을 당하고 만다.
경혜공주는 남편과 함께 간 광주유배지에서 처음으로 아들을 낳았다. 경혜공주는 16살 때 결혼해서 21살 때에 비로소 아들 정미수를 낳았던 것이다.
경혜공주가 이처럼 자식을 늦게 낳은 것은 동생 단종이 정치적 탄압을 당하고, 남편 정종이 유배를 당하는 등 엄청난 정치적 시련을 겪었기 때문에, 자식을 낳은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남편 정종과 함께 갔던 광주유배지에서 비로소 두사람은 부부간의 정을 나눌 수 있는 마음의 안정을 찾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세조는 경해공주의 남편 정종을 강원도 광주로 유배보낸 후에, 다시 정종을 반역죄로 몰아서 살해해 버렸다.
원래 조선시대에는 남편이 반역자로 처벌받으면, 반역자의 부인과 자식들은 무조건 관노로 팔려가는 것이 그당시의 법도였다.
남편 정종이 반역자로 몰려서 죽임을 당하자, 경혜공주는 순천의 관가의 관노로 끌려갔으며, 자식들도 똑같은 관노로 전락하게 말았다.
야사의 기록에 따르면, 지방관가의 노비로 끌려갔던 경혜공주는 지방수령에게 자신은 고귀한 왕가의 혈통인 공주인데, 누구한테 감히 노역을 시키느냐고 당당하게 호통쳤다고 한다.
위대한 세종대왕의 손주이자 문종의 딸로서, 그녀는 당당하게 왕가의 혈통답게 처신했다고 전해진다.
남편 정종이 죽고난 후, 경혜공주는 아들 정미수를 낳았고, 경혜공주가 자식을 낳았다는 소식을 들었던 세조는 환관에게 경혜공주가 딸을 낳았으면 살려주고, 아들을 낳았으면 그 아들을 죽이라는 밀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런데 세조의 부인 경희왕후는 그 환관을 다시 불러서 경혜공주가 아들을 낳았더라도 절대 죽이지 말고, 몰래 궁궐로 데려오라고 밀명을 내렸다고 한다.
세조는 경혜공주의 아들을 죽여서 후환을 없애려고 시도했지만, 그부인 경희왕후의 도움으로 경혜공주의 아들은 죽음을 간신히 면할 수 있었고, 남몰래 궁궐에서 키워지게 되었다.
아마도 경희왕후는 남편 세조가 저질렀던 악업 때문에, 문종의 자손들이 죽임을 당하거나 불행해진 상황에서, 최소한 문종의 손자만이라도 혈통을 이어주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 것 같다. 자기 형님의 자손들의 씨를 모두 끊어버리려고 했던 세조의 잔인함에 치가 떨려올 뿐이다.
세조 3년에 이르러, 세조의 장자인 의경세자가 병으로 죽었는데, 백성들 사이에서는 세조가 잔인하게 단종을 죽였기 때문에, 단종의 모후인 현덕왕후의 저주를 받아서 의경세자가 죽었다는 흉흉한 소문이 나돌았다고 한다.
야사에는 세조의 꿈에서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가 나타나서, 세조에게 ‘네놈이 내아들을 죽였으니, 나도 네 아들을 죽여버리겠다’고 말했다고 하는데, 실제로 세조의 장남 의경세자가 어린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다.
야사의 기록에 따르면, 세조는 왕이 된 후에, 밤마다 무서운 악몽에 시달렸다고 한다. 세조는 꿈속에서 자신에게 죽임을 당했던 수많은 고명대신들이 밤마다 찾아와서 자신을 괴롭했으며, 세조에게 침까지 밷었다고 한다.
그런데 잠에서 깨어난 후, 그 침밷었던 자리에 피부병이 생겼다고 한다.
실제로 세조는 욕창과 두드러기 같은 극심한 피부병에 시달렸고, 그 피부병으로 인해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백성들 사이에는, 세조가 왕위에 오르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을 죽였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사람들로부터 저주를 당하는 것이라는 소문까지 퍼져나갔다고 한다.
그런데 그 저주는 세조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 그의 후손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이다.
세조도 병에 걸려 만년에 고생을 많이 했지만, 그의 장자인 의경세자는 세조가 왕이 된 지 3년 만에 병으로 사망했고, 세조의 둘째아들인 예종도 20살의 젊은나이에 요절했으며, 세조의 증손자인 연산군은 왕위에서 폐위된 후 곧바로 사망했다.
세조의 장자를 비롯한 장손들이 모두 31살을 넘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병들어 죽었고, 증손자 연산군은 왕위까지 빼앗겼다.
이러한 세조의 후손들의 3대에 걸친 불행은 세조가 단종을 죽이고, 신하들을 살육한 것 때문에, 죽은 자들의 저주를 받아서였는지도 모른다.
오죽하면, 세조의 부인 경희왕후는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사람들의 원혼을 달래 주기 위해서, 원각사 같은 절까지 지어서 공양을 했을까?
그런데 남편 정종과 단종이 죽은 후에, 단종의 누나 경혜공주는 어떻게 되었을까?
남편과 동생을 모두 잃고 가슴이 찢어지는 원한에 사무쳤던 경혜공주는 결국 속세를 버리고 절 정업원에 들어가서 한동안 비구니로 살아갔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과 동생을 잃은 크나큰 슬픔과 한을 불심을 통해서 가라앉히려고 했던 것 같다.
지금의 종로구 흥인동에 위치했던 정업원은 고려시대 때부터 왕실의 여인들이 출가하는 절이었는데, 단종의 비인 정순왕후도 이 정업원에 들어가 비구니가 되었다고 한다.
단종의 비 정순왕후는 동망봉이라는 산봉우리에 올라가서 단종이 유배되어 갔던 동쪽의 영월땅을 매일같이 쳐다보곤 했으며, 누나인 경혜공주도 동망봉에 올라 동쪽의 영월땅을 쳐다보면서, 죽은 동생 단종을 그리워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경혜공주에게 유일한 아들이었던 정미수는 경희왕후의 보살핌 아래에 궁궐에서 안전하게 키워졌다고 한다.
정미수는 어린 시절부터 궁궐로 들어와서 경희왕후의 보호아래 잘 자라났으며, 나중에 성종이 되는 자을산군과 매우 친하게 지냈다고 한다.
그런데 절에 들어가서 생활했던 경혜공주는 4년 만에 절에서 나왔고, 그 후 그녀는 스스로 세조를 찾아가서 알현했다고 한다. 경혜공주는 왜 원수나 다름없던 세조를 스스로 찾아갔을까?
이 당시에 세조는 병에 걸려서 매우 위독한 상태였다고 하는데, 경혜공주는 와병중인 세조를 찾아가 문안인사를 드렸다고 한다.
원수나 마찬가지인 자신을 찾아와서 문안을 올리는 경혜공주를 본 세조의 마음은 크게 요동쳤고, 크게 감동했다고 한다.
자신으로 인해서 비참한 신분으로 추락한 경혜공주와 그 아들을 본 세조는 눈물까지 흘리면서 불쌍히 여겼다고 하며, 곧바로 경혜공주와 그 아들을 노비의 신분에서 풀어주고, 다시 왕족으로 복귀시켜주었다고 한다.
자신의 동생을 죽여서 왕위를 빼앗고, 자신의 남편을 죽였을 뿐만아니라, 또 자신과 아들을 노비로까지 전락시켰던 철전지 원수같은 세조였지만, 경혜공주는 원수같은 세조를 찾아가서 그를 설득시켜서 다시 왕족으로 복귀될 수 있었으니, 그동안 가슴에 사뭇쳤던 원한의 응어리를 어느정도 풀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조에게 죽임을 당한 동생과 남편은 결코 다시는 돌아올 수는 없는 법이다. 아마도 경혜공주가 철천지 원수인 세조를 찾아가서 문안을 드린 이유는 자신의 아들 정미수의 생명과 장래를 보장받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결자해지’ 라고 하지 않았던가! 자신과 자신의 아들에게 노비의 굴레를 씌워서 고통을 안겼던 사람은 세조이기 때문에, 그 고통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해줄 수 있는 사람 또한 세조 밖에는 없는 것이다.
철천지원수 같은 세조를 면전에서 보았던 경혜공주의 심정은 얼마나 처절했을까?
천금같은 동생과 남편의 원수였지만, 이제는 온몸에 욕창이 나서 피부가 곪아터지는 등 몹쓸병에 걸려 쇠약해진 세조의 몰골을 본 경혜공주는 속으로 세조가 과거의 악업 때문에 천벌을 받는구나 하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날 경혜공주와 세조의 극적인 만남으로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그 만남 이후에, 세조는 경혜공주의 아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경혜공주의 아들이름인 ‘정미수’ 바로 세조가 지어준 이름이라고 하는데, 눈썹이 하애지도록 오랫동안 장수하라는 의미로 ‘미수(眉壽)’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이것은 세조가 앞으로 경혜공주와 아들의 생명과 안전을 끝까지 보장해주겠다는 언약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세조는 경혜공주가 도성에서 편안히 살 수 있도록 큰집과 토지를 주었으며, 절까지 지어주었다. 세조는 지난날의 경혜공주의 불행에 대한 보상이라도 하듯이, 경혜공주와 그아들을 극진하게 보살펴주었다고 한다.
그리고 경혜공주의 아들 정미수는 15세의 나이에 성종으로부터 정7품의 관직을 받고, 국가관리로 활약할 수 있게 되었다.
아버지가 역적의 죄로 죽임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아들 정미수는 역적의 꼬리표를 끊고, 동녕부직장이라는 벼슬까지 얻어서 안전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아들이 편안한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게된 경혜공주는 39세의 나이에 한많은 삶을 마감하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아마도 경혜공주는 자신의 아들 정미수가 관직에 올라서 안전한 삶을 살 수 있게된 것을 확인한 후, 이제 자신의 역할은 끝났다고 생각하고는 죽은 동생과 남편이 있는 곳으로 떠나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세종대왕의 존귀한 혈통을 이어받았던 고귀한 공주였지만, 평생을 세조의 정치적 횡포에 휘말려서, 가련하고도 비극적인 삶을 살다간 비운의 정혜공주의 사연은 우리들의 가슴을 한없이 슬프고 애절하게 만드는 정말 가슴 아픈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경혜공주의 남편과 동생은 가엾게도 죽임을 당했지만, 그녀의 유일한 혈육인 아들이 장성해서 관직에 올라 안전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 평생동안 한맺힌 삶을 살아온 그녀의 가슴의 응어리가 조금은 풀렸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져본다.
이 세상에서는 불행했지만, 경혜공주가 저세상에 가서, 사랑스런 동생 단종과 남편을 다시 만나서, 이 세상보다 더욱 행복한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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