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처형과 연인 페르센백작과의 연애편지 내용. 초상화

2022. 8. 12. 16:01사랑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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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단두대처형과 연인 페르센백작과의 연애편지 내용. 초상화

마리 앙투아네트 - 1755년 11월 2일 ~ 1793년 10월 16일, 나이 39세 사망

마리 앙투아네트는 1789년도에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에 의해서 루이 16세와 함께 단두대에 처형당함으로써,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비극적인 왕비이지요.

과연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처형당할 만큼 큰 잘못을 저지른 죄인이었을까에 대해 큰 의구심을 품지않을 수가 없습니다.

당시 프랑스의 파리시민들이 가뭄과 흉작으로 인해 굶주리고 있을 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고 말함으로써, 시민들로부터 경멸과 증오의 대상이 된 마리 앙투아네트!

그렇지만, 나중에 이 발언의 진실이 밝혀졌는데,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런 말을 하지않았다고 합니다.

이것은 당시 프랑스대혁명을 일으킨 혁명군이 자신들의 혁명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 거짓으로 지어낸 말이라고 합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국왕 루이 16세의 부인으로서 왕비로서의 고귀함과 품격을 갖춘 고결한 여성이라고 알려졌습니다.

오스트리아 공주출신으로 16세의 어린 나이에 프랑스국왕 루이 16세에게 시집을 와서, 화려한 궁중생활을 누리기도 했지만, 갑자기 일어난 프랑스대혁명의 분노한 혁명군에 의해 체포되어, 단두대에 처형당함으로써 비참한 죽음을 당한 당대의 가장 불행한 왕비였지요.

비록 나중에 혁명군에 의해 체포되어 처참한 죽음을 당하기는 했지만, 마리 앙투아네트는 죽는 순간까지도 결코 비굴한 모습을 보이지않았고, 왕비로서의 고결한 품격과 기품을 잃지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런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숨겨진 애인이 있었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서 큰 충격을 주고있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오스트리아의 여제 마리아 테레지아의 막내딸인데, 오스트리아와 프랑스간의 동맹을 맺기위해 진행된 정략결혼에 의해서, 프랑스국왕 루이 16세에게 시집을 가게된답니다.

원래 마리 앙투아네트는 명랑하고 활달하며 사교적인 성격의 소유자이었고, 음악과 미술을 좋아하는 소녀였으며, 하프연주 실력 또한 수준급이었습니다.

그런데 너무 어린 나이에 갑자기 타국으로 시집을 와 엄격한 프랑스 구중궁궐의 규범에 속박당하게 되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향수병과 우울증에 걸리는 등 암울한 궁중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예술을 좋아했던 자유분방한 성격의 소녀 마리 앙투아네트가 프랑스 엄격한 궁중법도에 적응한다는 것은, 무척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일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처음 프랑스로 시집온 후, 프랑스국왕 루이 16세로부터 오랫동안 사랑을 받지못하고 독수공방하는 처지였기에, 7년 동안 아이를 갖지못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루이 16세가 성적인 결함이 있었기 때문에 아이를 갖지못했다고 하며,

루이 16세의 병이 치유가 된 후 몸상태가 호전되면서, 두사람간의 원활한 잠자리가 이루어질 수 있었고, 그 후 마리 앙투아네트는 4명의 건장한 자녀를 낳을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루이 16세의 성적 결함이 치유되고, 두사람 간의 화목과 사랑이 결실을 맺으면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는 안락하고 편안하게 왕궁생활을 해나갈 수 있게 된답니다.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했던가요!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화목한 궁중생활을 이어나가던 무렵에, 갑자기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게 됩니다.

루이 16세가 재위했을 당시 프랑스재정은 고갈되었고, 대기근과 계속된 흉작으로 인한 물가가 하늘 높은 줄 모르게 치솟으면서 프랑스의 경제가 파탄이 나자, 프랑스백성들의 삶은 도탄에 빠지게 됩니다.

18세기 후반의 대흉작으로 인해 프랑스 농업생산량이 급감하고 물가가 엄청나게 폭등하면서, 서민들의 삶은 완전 파탄나고 말았습니다.

프랑스왕정이 이처럼 파탄난 서민들의 삶을 해결하지 못하자, 불만을 품은 혁명세력과 농민들이 결탁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봉기를 일으켰고, 마침내 1879년에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나게 된답니다.

프랑스대혁명의 중심세력인 농민군은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방탕하고 호화로운 사치생활 때문에 프랑스경제가 파탄났다고 판단하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파리에 있는 튈르리궁에 감금시켜버렸답니다.

농민군에 의해 잡혀서 튈르리궁에 갇힌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언제 혁명군에 의해서 처형당할지 모르는 불안하고도 매우 위태로운 감금생활을 계속 해나가게 됩니다.

◆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파리 탈출

그런데,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791년 6월 20일 늦은밤, 프랑스 파리의 거리에 한 대의 마차가 급하게 달려가고 있었습니다.

이 마차에는 러시아귀족 코르프 남작가족과 가정교사가 타고 있었는데, 이 마차는 파리로부터 280km 떨어진 오스트리아의 몽메디로 가고 있었답니다.

그리고 한참 달려온 마차는 프랑스의 국경도시 바렌지역에서 잠시 멈추었습니다. 그런데 마차안에는 놀랍게도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그의 충실한 신하 페르센백작이 타고 있었습니다.

튈르리궁을 몰래 탈출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남들의 눈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귀족 코르프 남작가족과 가정교사로 위장을 하고 있었던 겁니다.

잠시 쉬기 위해서 마차에서 내린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페르센백작은 ‘폐하와 왕비마마, 여기서 머물면 안되옵니다! 혁명군들이 뒤에서 쫒아오고 있으므로, 마차를 계속해서 국경너머까지 몰고가야합니다!’라고 요구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페르센백작에게 매몰차게도 프랑스국왕 루이 16세는 ‘당장 이곳을 떠나라’고 명령을 했습니다.

그러자, 페르센백작은 국왕부부에게 ‘제가 두분을 끝까지 모실 수 있도록 허락해주십시요!’라고 요구했습니다.

그렇지만, 루이 16세는 페르센백작의 충성스러운 요구를 듣지않고, 그에게 당장 이곳을 떠나갈 것을 강력히 명령합니다.

사실, 스웨덴 출신의 귀족인 한스 악셀 폰 페르센백작은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충성을 다하는 매우 충직한 귀족이었습니다.

그런데, 프랑스궁중 주변에서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이 남몰래 연애를 하는 연인관계라는 루머가 퍼져있었고, 이같은 소문을 들은 루이 16세는 자신들의 탈출을 도운 페르센백작을 매몰차게 쫒아내고자 했던 겁니다.

그렇지만, 이같이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이 남몰래 연애한다는 소문은 사람들이 지어낸 근거없는 소문에 불과하며,

두사람은 단순한 왕비와 귀족의 관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페르센백작은 튈르리궁에 감금당한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출하기 위해서, 혼신의 노력을 다 기울였던 정말 충성스러운 귀족이었습니다.

페르센백작은 스웨덴의 유서깊은 귀족가문 출신으로서, 그의 가문은 스웨덴왕실보다도 재산이 더 많은 매우 부유한 가문이었고, 페르센백작은 당시 유능한 외교관이자 군인으로 복무하고 있었답니다.

그렇게 부족할 게 전혀 없었던 페르센백작이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구출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페르센백작은 자신의 엄청난 재산을 투자해서,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망명계획을 세워놓았습니다.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탈출과 망명을 위해서 페르센백작이 쓴 돈이 무려 150만 리브르라고 하는데, 이 돈은 현재의 가치로 200억원이나 된다고 합니다.

페르센백작은 자신이 모시는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해서 자신의 전재산을 털어 200억원의 경비를 마련해서, 두사람의 탈출을 시도했던 겁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찮은 루머 때문에, 질투에 눈이 먼 프랑스국왕 루이 16세는 자신들의 탈출을 도와준 페르센백작을 쫒아버리려고 한 겁니다.

그러자, 페르센백작은 루이 16세에게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말로 당부하는데요. ‘폐하, 국경을 넘을 때까지 절대로 마차에서 내리시면 안됩니다! 왕과 왕비의 얼굴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위험해지기 때문입니다’라고 페르센백작은 요구했습니다.

이런 페르센백작의 충직한 말을 듣는등 마는등 한 루이 16세 일행은 페르센백작을 남겨놓은 채 다시 마차를 몰고 국경지역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런데, 국경지역으로 달려가던 중 루이 16세는 ‘생트 므누’지역에서 마차를 멈추라고 명령합니다. 이 ‘생트 므누’지역은 프랑스의 작은 도시로 아직 국경지역을 벗어나지 않은 상태입니다.

루이 16세가 ‘생트 므누’에서 마차를 멈춘 이유는 이곳에서 유명한 음식을 먹기위함이었는데, ‘생트 므누’지역은 예로부터 맛좋은 족발찜 요리를 만드는 유명한 음식점이 있는 지역이었지요.

특히 식탐이 많고 맛 난 요리 시식을 좋아하는 루이 16세는 맛있는 족발요리를 먹기위해서, 위험천만하게도 ‘생트 므누’지역에서 마차를 멈추게 하고, 마차에서 내리게됩니다.

우리나라에서만 족발요리를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프랑스에서도 족발요리를 좋아한다고 하니, 정말 놀라운 일이네요.

그런데, 이 요리의 조리시간이 무려 4시간이나 걸린다고 합니다. 루이 16세는 뒤에서 자신들을 잡으려고 혁명군 추격대가 쫒아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태평스럽게 4시간을 기다린 끝에 게걸스럽게 족발요리를 먹었습니다.

이 당시 루이 16세는 자신들이 평민복장으로 변장을 하고있기 때문에, 아무도 자신들의 정체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지역의 우체국장인 장 바티스트 드루에가 이 음식점에 들렀다가 그만 이들의 얼굴을 보고 루이 16세를 알아본 겁니다.

루이 16세는 제위 당시 새 지폐를 발행했는데, 그 지폐에 루이 16세의 초상화가 그려넣어졌습니다.

우체국장인 장 바티스트 드루에는 그 지폐에 새겨진 루이 16세의 얼굴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음식점에서 족발을 먹고있는 루이 16세를 금방 알아보았고, 곧바로 당국에 신고해서 혁명군들이 출동하고 말았습니다.

혁명군들은 방금 음식점을 떠난 루이 16세의 마차를 추격해서 바렌지역에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체포했고, 두사람은 파리로 끌려와서 다시 감금당하고 맙니다.

페르센백작이 마차에서 내리지말라고 그토록 당부했는데도 불구하고, 그 놈의 알량한 족발 때문에,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는 또다시 혁명군에게 체포되어 감금당하는 비참한 처지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두사람이 다시 감금당하고 1년 7개월이 지난 1793년 1월, 루이 16세는 혁명재판을 통해서 사형판결을 받고, 단두대에 의해서 참수형을 당하였고, 그로부터 9개월이 지난 10월 16일날, 마리 앙투아네트도 혁명재판에서 사형판결을 받고, 콩코드광장의 단두대에 의해 처형당하고 말았답니다.

◆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의 60통의 연애편지, 두사람은 연인관계?

그런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한 전혀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처형당하고 84년이 지난 1877년도에 스웨덴에 살던 페르센백작의 조카가 돌연 60통의 편지를 공개했습니다.

놀랍게도 60통의 이 편지는 바로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이 주고받은 러브레터라고 합니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탈출에 실패하고 다시 튈르리궁에 감금되었던 1791년 6월부터 1792년 8월까지의 1년 2개월동안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은 서로 수많은 편지들을 주고받았다고 하며, 그들이 주고받은 편지의 수는 무려 60통이나 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이 주고받은 편지의 중요한 부분은 검은색으로 덧칠을 해서 알아볼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혁명군에 의해 감금당하고 난 후, 자신들의 운명을 알 수가 없는 위태로운 시기에 마리 앙투아네트가 느끼는 절박하고도 침통한 심경이 한껏 담긴 편지라고 하는데요.

그렇지만, 편지의 여러 군데에 주요부분이 검은색으로 덧칠이 되어있어서, 그 상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어서 큰 아쉬움을 남겨주었는데요.

그렇지만, 편지가 공개된 후 230년이 지난 2021년도에, 프랑스 소르본대학 연구팀이 검은색 덧칠부분을 분석하면서 그 내용을 복원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소르본대학 연구팀은 편지의 덧칠된 부분의 성분을 분석해서 엑스레이 형광스케너로 글자를 해독하는데 성공했고, 그부분의 숨겨진 내용을 알아낼 수 있었습니다.

과연 덧칠된 그 부분의 숨겨져있던 곳에는 어떤 내용이 들어있었을까요?

그런데 그 덧칠된부분의 내용은 엄청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편지들은 1년 2개월 동안 튈르리궁에 감금당했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센백작에게 보낸 연애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들의 내용 공개로, 그동안 소문으로만 나돌았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이 서로 연인관계였다는 것이 사실로 증명되었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센백작에게 보낸 편지 내용인데, 그녀의 편지에는 ‘내 사랑, 페르센백작! 당신없이는 내 마음이 결코 행복할 수 없어요!’ ‘나는 단지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만 살아가고 있답니다’ ‘내가 사랑하고 앞으로도 영원히 사랑할 당신!’이라고 적혀있었답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센백작에게 마지막으로 보낸 편지에는 '나의 마음은 온전히 당신 것이예요!'라는 내용도 들어있었답니다.

그리고 아래는 페르센백작이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보낸 편지내용입니다.

‘당신과 만나 당신만을 사랑하고, 당신을 위로하는 것이 내가 바라는 모든 것입니다’

정말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남편과 4명의 자네들까지 있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비밀리에 페르센백작이라는 귀족을 연인으로 두고있었고, 두 사람은 국왕 모르게 비밀 연애편지까지 주고받았던 겁니다.

그런데, 페르센백작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주고받았던 이 편지의 노골적인 애정표현 문장들을 남들이 알아보지 못하도록 검은색으로 덧칠을 해서 보관해놓았던 겁니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은 서로 연인이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오스트리아공주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1774년도에 프랑스국왕에게 시집을 와서, 오랫동안 아이를 낳지못하면서 혼자 방에서 독수공방하는 외로운 처지였습니다.

거기다가 향수병에 걸리고 우울증에 걸려서, 그녀는 오랫동안 정신적으로 무척 힘들어했습니다.

엄격한 프랑스궁중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힘들어하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위로해주기 위해서, 루이 16세는 그녀에게 아담한 프티트리아농 궁전을 선물로 주었답니다.

자신의 우울증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서, 마리 앙투아네트는 이 프티트리아농 궁전에서 종종 파티를 열였고, 이 곳에서 많은 귀족들을 만나고 교류를 해나갔습니다.

그런데 당시 왕세자비였던 마리 앙투아네트는 그녀의 궁궐에서 열린 가면무도회에서 아주 멋지고 잘생긴 귀족남성을 만나게 되었는데, 그 남성이 바로 페르센백작이었습니다.

스웨덴에서 온 페르센백작은 잘생긴 미남자인데다 좋은 성격과 지성미를 갖추고 있었고, 화술도 뛰어나서 파티에서 큰 인기를 끌고있었던 파리 사교계의 최고매력남이었습니다.

더욱이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은 나이가 동갑인데다, 두사람 모두 외국에서 온 이방인이라는 공통점을 갖고있어서, 두사람은 처음부터 서로간에 끈끈한 동질감과 호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은 파티에서 더욱 자주 만나면서, 급속도록 관계가 가까워져서 두사람이 알콩달콩한 사이가 되자, 마침내 귀족들 사이에 두사람이 연인관계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나갔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왕세자비였을 때부터 그녀와 친해진 페르센백작은 그 후 베르사이유궁전을 자주 드나들면서, 두사람의 관계가 연인관계로 발전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1789년도에 프랑스대혁명이 발생하였고,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혁명군에 의해서 체포되어 유폐되어 버리자, 마리 앙투아네트를 무척 사랑했던 페르센백작이 거금을 들여서 두사람을 탈출시기키 위한 계획을 세웠던 겁니다.

페르센백작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모국인 오스트리아로 두사람을 망명시키기 위해서 여러장의 러시아여권을 준비했을 뿐만아니라, 루이 16세와 가족들을 러시아백작과 하인으로 위장시키는 등 치밀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리고 페르센백작은 대형마차 여러대를 준비해서 다량의 식량과 술, 옷가지를 가득 싣고, 루이 16세와 왕비, 그리고 왕의 자녀들과 하인들까지 태워서, 비밀리에 파리를 탈출해 국경지역으로 달려갔던 겁니다.

그렇지만, 루이 16세의 천방지축 행동 때문에, 국경지역 바렌에서 혁명군에 체포되어 국왕와 왕비는 다시 튈르리궁에 감금당하는 비참한 처지로 전락했습니다.

그리고 1793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 처형당하기 전까지의 1년 2개월간의 유폐생활 동안에,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은 자신들의 절박한 심경과 두사람간의 애틋한 사랑의 마음을 담은 60통의 편지들을 서로 교환했던 겁니다.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의 비밀 연애편지가 해독되어 공개됨으로써, 그동안 가짜루머로 치부되었던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의 열애가 사실로 확인되었고, 두사람이 연인관계였다는 것 또한 사실로 증명되었습니다.

그토록 고결하고 품격 높았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실은 남몰래 외간 귀족남자와 연인관계에 있었고, 수십통의 비밀 연애편지까지 주고받았다고 하니, 정말로 놀랍고도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답니다!

이 수십통의 편지들에는 마리 앙투아네트가 페르센백작에게 노골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문장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때문에, 이 편지들이 단순히 정신적인 위안을 얻을 생각으로 쓴 문안편지라고 볼 수는 없으며, 누가 보더라도 명백하게 두 연인사이에 쓰여진 연애편지라는 것이 분명해 보입니다.

언제 죽음을 당할지도 모르는 위태로운 투옥상태에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이 유일하게 의지하고 사랑하는 연인 페르센백작에 자신의 애절하면서 애틋한 사랑을 구구절절히 표현한 마리 앙투아네트의 연애편지가,

우리들에게 그 절박함과 애절한 마음이 진하게 느끼지면서, 우리 마음속으로 너무도 가슴 아프게 다가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굶주리는 파리시민들에게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세요!’라는 말을 했다고 하며, 이 말 때문에 프랑스백성들이 더욱 분노해서 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하는데요. 이것은 전혀 잘못 전해진 오해랍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길거리에서 굶주리는 아이들을 보고 ‘아이들에게 브리오슈를 주세요!’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 말이 와전되어서 케이크를 먹이라는 말로 변질된 것입니다.

마리 앙투아네트가 말했던 ‘브리오슈’는 케이크가 아니라, 계란과 버터를 넣어 만든 프랑스인들이 평소에 즐겨먹던 평범한 빵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프랑스대혁명을 일으킨 혁명세력들이 자신들의 혁명을 합리화시키고 프랑스왕실을 타도해버릴 명분을 만들기 위해서, ‘브리오슈’를 ‘케이크’로 바꿔서 거짓된 말을 퍼뜨렸던 겁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혁명세력의 주장과는 정반대로 검소한 생활을 한 마음씨가 고운 왕비였습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궁전옆에다 밭은 일궈서 오이나 호박, 감자 농사를 직접 짓는 등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마리 앙투아네트는 자신의 집사가 갑자기 병으로 사망했고, 그의 자녀들이 고아가 될 위기에 처하자, 집사의 자녀들을 자신의 자녀로 입양해서 양육했을 정도로 인정이 많고 자비로운 왕비였답니다.

그렇지만 프랑스혁명을 일으킨 혁명세력은 왕실에 대한 농민들의 분노와 증오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그녀에 대한 가짜뉴스를 퍼뜨려서 선한 왕비를 악녀로 둔갑시켜 버렸습니다.

심지어 혁명군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신의 친족과 근친상간을 했다는 터무니없는 가짜뉴스까지 만들어 터뜨리기까지 했답니다.

혁명세력은 프랑스혁명을 성공시키고 백성들을 선동하기 위해서, 무언가 강력한 희생제물이 필요했고, 원래 선하고 검소했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혁명의 희생물로 삼기 위해서, 이같은 거짓선전을 퍼뜨려서, 사치와 허영을 일삼는 악한 왕비로 둔갑시켜버린 겁니다.

마리 앙투아네트는 소문과는 다르게 매우 검소한 생활을 했으며 아무런 잘못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시대를 잘못타고난 죄 때문에, 혁명세력의 희생물로 바쳐져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안타깝고 가엾은 비운의 왕비입니다.

현재 마리 앙투아네트와 페르센백작의 비밀연애편지는 모두 프랑스 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다고 합니다.오늘은 프랑스의 국왕의 아내이자 고결하고 품격높은 왕비로서 화려한 삶을 살았던 마리 앙투아네트가 비밀리에 외간남자인 귀족백작과 비밀연애를 했다는 놀라운 사실과 두사람간의 수십통의 연애편지를 주고받았다는 충격적인 이야기를 전해드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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