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초상화와 죽음, 폐위와 복위사건

2022. 5. 17. 20:36사랑방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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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초상화와 죽음, 인현왕후 폐위사건, 장희빈의 사망원인

숙종의 마음을 사로잡으면서 일개의 궁녀에서 중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장희빈!

그렇지만 숙종의 마음이 떠나가고, 인현왕후가 다시 복위되자, 질투에 눈이 멀게되고 결국 숙종의 노여움을 사서 사약을 받고 죽임을 당하는 장희빈!

우리역사는 장희빈을 간사스러운 요부이자 희대의 악녀로 묘사하고 있으며, 인현왕후를 어질고 덕망높은 인자한 왕비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것이 과연 사실일까요?

정말로 장희빈은 역사가들의 평가대로 희대의 잔악한 요부였고, 인현왕후는 덕망높고 인자한 왕비였을까요?

오늘을 조선후기 숙종의 사랑을 놓고 서로 경쟁을 벌였던 두 여인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관계와 숨겨진 진실을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 역대 최대의 라이벌 인현왕후와 장희빈과 두 배후세력

역대 조선의 후궁 중 가장 아름다운 미인으로 알려졌던 장희빈은 숙종을 유혹해서 궁녀에서 왕비로 신분상승을 했고, 후궁 최고의 자리에까지 오른 그녀는 자신의 연적이었던 최숙빈을 핍박하고, 인현왕후를 저주한 죄를 저질러서, 마침내 사약을 먹고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숙종의 정비였던 인현왕후와 숙종의 후궁이었던 장희빈은 숙종의 사랑을 더 많이 받기위해 서로 경쟁하고 대립하는 관계였는데, 사실 두 여인은 그 당시의 두 정치세력인 서인과 남인간의 정치싸움에 이용당한 측면이 매우 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숙종시대에 권력을 놓고 서로 경쟁관계에 있던 두 정치세력이 바로 서인세력과 남인세력이었답니다.

서인세력은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인현왕후를 숙종의 왕비로 천거했고, 또한 남인세력은 장희빈을 숙종에게 소개해 후궁으로 만듦으로써,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우리는 단지 인현왕후와 장희빈이라는 두 여인이 숙종의 사랑을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한 질투심 때문에 서로 경쟁하고 반목했다고 알고있지만요.

정확히 말하자면,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암투와 대립은 서인과 남인 같은 두 정치세력이 서로 권력을 독점하기 위한 정치적 계략과 음모가 그 배후에서 작용했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보면,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조선 후기 숙종 시절에 서로 정권을 차지하기 위한 서인과 남인이라는 두 정치세력의 권력투쟁, 정치싸움의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지요.

인현왕후와 장희빈 모두 서인과 남인의 정치게임에 의해서 숙종의 여인으로 발탁되었습니다만.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숙종이라는 한 남자를 사이에 놓고, 더 많은 사랑을 받기위해서 서로 질투하고 경쟁할 수밖에 없는 불행한 운명을 짊어지고 살아갔던 조선시대의 비련의 여주인공들이었습니다.

장옥정(장희빈)은 역관출신인 장형의 딸이며, 궁녀출신으로서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입지전적인 여인입니다.

장옥정(장희빈)은 아버지 장형이 일찍 사망하고 가세가 기울자, 어린 나이에 일찍 궁궐에 궁녀로 들어와서, 자의대비 조씨를 모시는 궁녀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숙종이 우연히 자의대비전을 찾았다가 미모가 출중한 장옥정을 발견했고, 그녀의 미모에 홀딱 반한 숙종은 장옥정과 하룻밤 첫사랑을 나누었고, 그녀에게 숙원의 첩지를 내리고 후궁으로 삼았습니다.

이렇게 숙종은 아름다운 미모를 지닌 장옥정에게 첫눈에 반해서 그녀와 동침을 나눈 후, 그녀에게 후궁의 첩지를 내렸으며, 이 때부터 숙종과 장옥정의 뜨거운 사랑이 시작이 된답니다.

그런데, 이것을 눈치챈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민씨는 장옥정(장희빈)을 천박한 가문의 소생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궁밖으로 퇴출해버립니다.

이로써 숙종과 장옥정(장희빈)의 사랑은 장옥정의 궁궐밖 퇴출로 인해서 중단되고맙니다.

사실 장옥정이 퇴출된 진짜이유는 숙종의 어머니 민씨가 서인세력에 속해 있었는데, 자신과 적대관계에 있는 남인세력의 인물인 장옥정이 왕의 후궁이 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요.

당시 서인의 핵심인물인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와 서인세력은, 자신들의 정적이었던 남인세력을 견제하기 위해서, 남인의 상징인물인 장옥정을 쫒아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답니다.

이렇게 장옥정이 궁궐밖으로 퇴출되고 난 후, 숙종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는 서인세력의 추천을 받아서 인현왕후를 숙종의 부인으로 삼습니다.

즉, 숙종이 사랑했던 장옥정이 쫒겨남과 동시에 곧바로 인현왕후가 왕비로 책봉되게 된답니다.

그런데, 숙종의 어머니 명성왕후 김씨와 숙종의 외가친척들은 모두 서인세력이었기에, 서인가문의 처자인 인현왕후를 왕비로 책봉한 것은 서인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기 위한 포석이었습니다.

즉, 서인세력이 남인에게 집중된 권력을 빼앗기 위해서 서인세력의 상징인물인 인현왕후를 왕비로 책봉되도록 공작을 벌였던 겁니다.

이렇게 인현왕후가 왕비로 책봉된 것을 기화로, 당시까지 정권을 쥐고있었던 남인세력은 모두 숙청당하였고, 서인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게 된답니다.

그런데, 숙종은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장옥정을 잊지못하고 그녀를 몹시도 그리워했으며, 어머니 김씨가 열병으로 사망한 후, 숙종은 출궁시킨 지 6년 만에 다시 장옥정을 궁궐로 불러들였으며, 그녀를 다시 자신의 후궁으로 삼았답니다.

♥ 숙종의 사랑을 놓고 벌어지는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반목과 암투

이렇게 장옥정(장희빈)이 다시 궁궐로 환궁한 후, 그녀는 숙종의 뜨거운 총애를 받으며,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이 때문에, 인현왕후와 장희빈 사이에 금이 가기 시작했고, 인현왕후는 장옥정(장희빈)을 심하게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 우리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놀랍게도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심하게 질투했다고 합니다.

우리들에게는 항상 인자하고 자애로운 왕비로만 알려졌던 인현왕후이지만, 숙종이 매일같이 장희빈의 처소만 찾는 등 장희빈만을 심하게 편애하자, 그녀도 여자인지라 인현왕후도 여자로서 종종 질투심을 표출하곤 했답니다.

한 때는 인현왕후가 이런 술수를 부린 적도 있다고 하는데요.

숙종이 너무 지나치게 장희빈의 처소만을 찾아가고 자신을 독수공방시키자,

인현왕후는 숙종을 모시는 내관을 불러서 ‘장희빈이 몸이 아파서 전하를 뫼실 수 없다’고 거짓고변을 하도록 사주를 했다고 합니다.

또한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불러서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 잡는다는 이유로 장희빈에게 회초리로 때린 적도 있습니다.

인현왕후는 숙종과 혼인한 지, 5년이 지났는데도 불구하고 전혀 임신을 하지못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장희빈이 임신했다는 놀라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에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불러서 함부로 임신소식을 전하는 등 내명부의 기강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를 들어 장희빈을 회초리로 때렸습니다.

사실, 이 때에 장희빈은 큰 잘못이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회초리로 때린 것은 그녀에 대한 질투심 때문으로 보여집니다.

그뿐만 아니라,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장희빈을 모함하는 말을 하기도 했답니다.

인현왕후는 숙종에게 ‘제가 어젯밤에 꿈을 꾸었는데, 명성황후(숙종의 모친)가 나타나서 계시를 내렸는데,

장희빈은 전생에 짐승의 몸이었는데, 주상(숙종)께서 활로 쏘아서 죽이셨고,

죽었던 그녀는 큰원한을 품고 다시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그녀는 불순한 무리의 사주를 받고 입궁한 여인이니, 쫒아내야 합니다’라고 말했답니다.

또한 인현왕후는 또다시 숙종에게 ‘제가 꿈속에서 선왕(숙종의 부친)과 선후(숙종의 모친)를 만났는데,

선왕과 선후의 말에 따르면, 저(인현왕후)는 복록이 많아서 자손이 많을 것이지만,

장희빈은 복이 없어서 아들을 낳지못할 것이다. 또한 장희빈에는 오랫동안 액운이 가득 차있어서 국가에 이롭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내용들은 모두 조선시대 왕조실록인 ‘숙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입니다.

즉, 인현왕후는 장희빈을 전생에 숙종이 화살로 쏘아 죽인 짐승이 환생한 짐승의 화신이며,

불순한 무리의 사주를 받아서 나라를 어지럽힐 여인이니, 궁궐에서 쫒아버리라고 숙종에게 장희빈을 모함하는 이야기를 한 것이랍니다.

또한 인현왕후는 꿈속에서 시부모님들이 나타나서 자신에게 계시를 내렸는데, 장차 자신은 아들을 낳을 것이지만, 장희빈은 결코 아들을 낳지못할 것이라고 또다시 숙종에게 장희빈을 모함하는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이렇게 인현왕후는 숙종의 총애를 독차지하고 있는 장희빈에 대해서 그녀를 ‘짐승의 화신’ ‘아들을 낳지못할 것’ 등 나쁜 말로 모함하면서, 장희빈에 대해 심한 질투를 했던 겁니다.

이 숙종실록의 기록은,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얼마나 심하게 질투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증거자료입니다.

그동안 한없이 인자하고 덕망 높은 왕비로만 알았던 인현왕후가 장희빈을 짐승의 화신이라고 표현하면서, 숙종에게 그녀를 궁궐에서 쫒아낼 것을 종용했다고 하니, 정말 놀랍고도 믿어지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장희빈도 잘못한 부분이 있습니다. 장희빈이 숙종의 총애를 등에 업고, 인현왕후 등 자신의 상전 앞에서 종종 매우 건방지고 방자한 행동을 했다고 합니다.

인현왕후가 장희빈에게 회초리로 때린 것도 장희빈의 오만방자한 태도를 꾸짖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이렇게 궁궐안에서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서로 반목과 대립을 반복되던 시기에 마침내 장희빈이 아들을 낳게되면서,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관계는 대반전이 일어나게 됩니다.

인현왕후의 폐위와 폐위사유

숙종의 총애를 듬뿍 받은 장희빈은 1688년 아들을 출산하게 됩니다. 아들이 하나도 없던 숙종은 장희빈이 첫아들을 낳자, 드디어 왕통을 이을 수 있게 되었다면서 무척 기뻐했다고 합니다.

인현왕후가 숙종에게 말했던 말과 정반대로 된 것인데, 인현왕후는 5년 넘도록 전혀 아기를 낳지 못했지만, 장희빈은 왕의 후계자가 될 수 있는 건장한 아들을 낳았던 겁니다.

숙종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을 태어난 지 3개월만에 원자로 삼았고, 아들을 낳은 장희빈을 후궁 최고의 품계인 ‘희빈’으로 봉했습니다.

장희빈이 받은 ‘희빈’은 정1품으로 후궁으로서는 최고의 품계이며, 왕비 바로 아래의 품계입니다.

장희빈이 왕자를 낳게되자, 그동안 권력을 담당해왔던 송시열 등 서인세력은 모두 숙청당하면서 쫒겨나는 신세가 되었고, 숙종은 다시 남인을 등용하면서 남인세력이 정권을 담당하게 됩니다.

장희빈이 아들을 낳은 그 다음해인 1689년도에 마침내 인현왕후는 숙종의 미움을 받아서 폐서인되면서 궁궐에서 쫒겨나게 됩니다.

아들을 낳은 장희빈에게 흠뻑 빠진 숙종은 아들을 낳지못하는 인현왕후를 마침내 왕비자리에서 폐위한 후, 궁궐에서 쫒아내버렸답니다.

숙종은 인현왕후 폐위이유로 다음과 같은 이유를 들었는데요.

1689년 4월 23일날이 인현왕후의 생신일이었는데, 숙종은 이날 일체의 생신 하례의식을 하지말라는 어명을 내렸습니다.

이같은 어명에 인현왕후는 자신의 생신 하례의식을 받지 않으려고 했지만, 일부 신하들은 생신하례의식은 국모의 당연한 권한이라는 이유를 들어서, 인현왕후에게 생신축하 하례를 올렸습니다.

대신들이 인현왕후의 생신하례를 했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숙종은 크게 대노하였고, 이것을 트집삼아, 숙종은 인현왕후에게 ‘투기를 일삼은 죄’ ‘거짓고변을 한 죄’ ‘국정을 어지럽힌 죄’ ‘내전에서 당파를 나누어 붕당을 일으킨 죄’ 등 여러가지 죄명을 붙여서 왕비에서 폐위시키고 출궁시켜버렸습니다.

숙종은 사실 아무 잘못이 없는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기 위해서 억지의 누명을 씌운 것인데, 이렇게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한 이유는 그녀를 폐위시킴으로써, 그녀의 배후세력인 서인세력을 축출하기 위해서입니다.

또한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한 또다른 이유는, 자신의 아들을 잉태한 총애하는 장희빈을 국모의 자리에 올리기 위한 고도의 계략이었다고 판단됩니다.

숙종이 단행한 인현왕후 폐위로 인해 서인세력은 모두 권력으로부터 쫒겨나게 되고, 다시 남인세력이 권력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답니다.

이같은 숙종의 변덕과 권모술수로 인해서, 죄없는 인현왕후는 궁궐에서 쫒겨났고, 궁궐밖 사가에 유폐된 체, 6년동안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감금생활을 겪게됩니다.

반면, 왕세자를 낳은 장희빈의 위세는 엄청 높아졌고, 1690년 장희빈은 세자를 낳은 공로로 왕비의 자리에 오르게됩니다.

♥최숙빈의 등장과 장희빈의 몰락

이렇게 장희빈이 왕세자를 낳고 왕비에 오르는 등 기세등등하던 시절에, 또다른 이변이 발생하게 됩니다.

어느날, 숙종은 궁궐시찰에 나섰는데, 그 때 궁궐 한쪽에서 누군가가 크게 곡하는 소리가 나서 그곳으로 발길을 돌렸답니다.

한 궁녀의 방에서 큰소리로 곡하는 소리가 났고, 숙종은 그 궁녀의 방문을 활짝 열어보았는데요.

그 방안에는 한 궁녀가 음식상을 차려놓고 혼자서 구슬프게 곡을 하고 있었습니다.

숙종이 그 궁녀에게 무엇을 하고있는가 라고 물었는데, 그 궁녀는 오늘이 인현왕후의 탄신일이라면서, 폐위된 인현왕후의 탄신일을 기리는 경하의식을 치르고 있다고 대답하였습니다.

바로 그 때에 인현왕후의 생신일을 기리는 경하의식을 치렀던 그 궁녀는 바로 최무수리(최숙빈)이었고, 최숙빈은 과거에 자신이 모시던 인현왕후를 잊지못해  해마다 인현왕후의 탄신일을 기리는 의식을 치러왔던 겁니다.

이미 폐위된 옛주인을 위해서 인현왕후의 생신상을 마련하고 생신축하의식을 치르는 최숙빈의 갸륵한 마음에 크게 감동받은 숙종은 곧바로 그녀에게 성은을 내리고, 그녀에게 왕의 후궁인 숙원의 첩지를 내렸습니다.

이 시기에 세자를 낳은 장희빈은 왕비의 자리에까지 오르는 등 날로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고, 반면 인현왕후는 폐서인되어서 가택에 연금되는 불우한 신세로 전락했습니다.

이렇게 두 여인의 처지가 정반대가 되어서 장희빈은 왕비가 되어 최고의 위세를 떨치는 반면, 폐서인된 인현왕후는 밑바닥으로 추락하는 등, 두 여인의 운명은 극과극으로 정반대의 길을 가게됩니다.

그런데, 이렇게 장희빈의 위세가 하늘을 찌를 듯 올라갈 무렵, 새로운 여인 최숙빈이 등장한 것이랍니다. 

장희빈과 최숙빈은 서로 정치적 입장이 완전 정반대였으며, 장희빈은 남인소속인데 반해, 최숙빈은 인현왕후와 같은 서인소속이었기에,

이처럼 정치적으로 앙숙관계에 있었던 최숙빈과 장희빈 사이에도 서로 반목하고 대립하는 암투가 벌어지게됩니다.

특히 이 시기에 장안에는 아이들 사이에 ‘미나리(인현왕후 민씨)는 사철이요, 장다리(장희빈)는 한철일세’라는 노래가 유행했는데요.

이 노래를 풀어보면, 현재 최고의 영예를 누리고있는 장희빈은 잠시 머무는 것 뿐이요, 곧 인현왕후의 세상이 다시 올 것을 예고하는 노래랍니다.

이런 노래가 장안에서 유행할 정도라면, 폐서인된 인현왕후를 가엾이 여기고 그녀가 다시 왕비로 복위되는 것을 갈망하는 민심이 백성들 사이에 파다하게 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사씨남정기는 김만중이 쓴 소설인데, 숙종이 요사스러운 후궁(장희빈)의 간교한 미인계에 넘어가서, 자신의 조강지처인 인현왕후를 폐출하는 것을 맹렬히 풍자한 내용의 소설인데,

이 사씨남정기가 널리 보급되면서, 일반백성들 사이에 숙종이 인현왕후를 내친 것에 대한 반발여론이 크게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그리고, 서인세력을 중심으로 물밑에서 인현왕후 복위운동이 일어났고, 인현왕후 복위운동은 점점 일반민중들 사이에 널리 확산되어 나갔습니다.

이런 와중에, 최무수리(최숙빈)도 서인세력과 결탁하여 인현왕후 복위운동을 함께 벌여나갔습니다.

최무수리(최숙빈)가 인현왕후의 생신일축하의식을 행한 것도 따지고보면, 서인세력과 결탁해서 이뤄진 인현왕후복위운동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인현왕후의 생신일축하의식을 통해서 숙종의 돌아선 마음을 다시 되돌리면서, 인현왕후의 향수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려는 의도였던 겁니다.

이것은 단지 최숙빈의 혼자만의 행동이 아니라, 서인세력과의 결탁하에 계획적으로 진행된 ‘인현왕후복위운동’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후궁의 첩지를 받은 최숙빈이 숙종의 총애를 받고,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하자, 질투심에 눈이 먼 장희빈은 내명부의 기강을 바로잡는다는 명분으로 최숙빈을 불러서 폭행을 일삼았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소식이 대전으로 흘러들어갔고, 폭행소식을 전해들은 숙종이 취선당으로 직접 찾아가서 최숙빈을 두들겨패던 장희빈의 폭행을 저지시키고, 최숙빈을 구출해주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이 일로 숙종은 투기를 일삼하는 장희빈을 점점 더 멀리하고, 최숙빈을 더욱 더 총애하게 되었지요.

인현왕후복위운동에 가담한 최숙빈은 은연중 폐비된 인현왕후를 숙종에게 상기시키는 역할을 하면서, 숙종의 마음을 되돌리려고 노력했습니다.

숙종은 최숙빈을 정4품의 벼슬인 숙원으로 봉했고, 숙종의 사랑을 듬뿍 받았던 최숙빈은 마침내 왕자를 출산하였으며, 그 왕자는 나중에 왕으로 등극하게되는 영조랍니다.

결국 1694년, 완강했던 숙종의 마음이 많이 누그러지면서, 마침내 숙종은 마음을 바꿔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복위시키고, 그녀를 다시 궁궐로 들어오게 했습니다.

최숙빈과 서인세력이 그동안 부단히 노력해온 인현왕후복위운동이 결국 성공한 것이며, 인현왕후는 다시 왕비의 자리로 복위되었습니다.

폐비되어 궁궐에서 쫒겨나 사가에 감금되어 6년동안 온갖 고초와 서로움을 다 겪은 인현왕후는 천신만고 끝에 다시 왕비로 복위되었고, 왕비였던 장희빈은 다시 희빈으로 강등되고 맙니다.

이 때 조선 조정에 또한번의 정치적인 회오리가 몰아쳤는데, 권력을 잡았던 장희재 등 남인세력은 숙종에 의해 모두 축출되었고, 숙종은 인현왕후와 가까운 서인세력들을 다시 권력의 요직에 등용해서 서인중심의 정권을 구축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다시 왕비로 복귀한 인현왕후가 복위된 지 얼마 지나지않아 심각한 질병에 걸렸고, 시름시름 앓던 인현왕후는 결국 1701년 35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하고 맙니다.

인현왕후는 유폐생활을 하던 6년 동안에 온갖 고초를 다 겪은 후, 몸이 피폐해져서 결국 ‘통풍’이라는 몹쓸 질병에 걸렸고, 결국 병을 극복하지 못하고 사망하고 맙니다.

♥ 장희빈의 사약, 사사당한 진짜이유

인현왕후가 사망하자, 조정에서는 장희빈을 다시 왕비로 복위시키려는 노력이 전개되었답니다. 그런데, 만약 장희빈이 다시 왕비가 된다면, 그녀와 대척점에 서있던 최숙빈과 서인세력은 완전 궁지에 몰리게 된답니다.

과거, 인현왕후와 장희빈이 서로 정적관계에 있었던 것처럼, 인현왕후가 죽은 지금 최숙빈과 장희빈이 서로 정적관계에 놓이게된답니다.

그 시기에 장희빈이 거주하는 취선당 근처에 신당을 설치되어 궂판을 벌어진다는 사실이 외부에 유출되었고, 특히 최숙빈은 그 신당에서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판을 벌인다는 첩보를 얻어냈답니다.

인현왕후가 사망한 지 한달 후, 최숙빈은 장희빈이 취선당 서쪽에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저주하는 굿을 했다고 숙종에게 고발했답니다.

그러면서, 최숙빈은 인현왕후는 병 때문이 아니라 장희빈의 저주굿에 의해 시해당한 것이라고 숙종에게 고변을 했습니다.

숙종은 인현왕후를 다시 복위시켰을 때부터, 장희빈의 처소를 한번도 찾지않았다고 합니다.

즉, 이 시기에 숙종의 마음은 이미 장희빈에게서 멀어져있었습니다.

그런데, 숙종은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해서 죽게만들었다는 밀고가 들어오자, 미래에 후환이 될 수 있는 장희빈을 이번 기회에 숙청할 계획을 세우게된답니다.

숙종의 명령으로 국문이 열리고, 관련자들에 대한 심문이 진행됐는데, 무당과 궁녀들을 형틀에 묶어놓고 극심한 고문이 가해졌고, 인현왕후에 대한 무고죄(巫蠱罪)의 자백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무고죄(巫蠱罪)는 무당의 굿을 통해서 남을 저주하는 행위를 뜻합니다.

숙종은 대신들에게 장희빈이 몰래 신당을 차려놓고 인현왕후를 시해하기 위한 저주굿을 했다는 사실을 공식발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고변이 들어온 지 한달 후, 숙종은 장희빈에게 사약을 받을 것을 명했고, 장희빈은 그 사약을 먹고 사망했는데, 이 때 장희빈의 나이는 43세였습니다.

인현왕후는 35세, 장희빈은 43세, 두 여인 모두 꽃다운 젊은 나이에 한많은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소설 인현왕후전에는 장희빈이 사약을 받을 때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묘사했는데요.

국왕이 사약을 내리자, 장희빈은 ‘내가 세자의 모후이다! 내가 무슨죄를 졌길래, 사약을 마시라고 하느냐? 너희가 나를 죽게 하고도 세자의 손에 살기를 바라느냐?’라고 큰소리를 지르며 난동을 부리면서, 사약받기를 완강히 거부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장희빈은 자신이 세자의 모후인 것을 내세워서, 집행관들을 겁박하면서 사약받기를 완강히 거부했는데, 결국 숙종이 직접 친전해 명령을 내려서 나인들로 하여금 장희빈의 입을 벌리게해서 그녀의 입속으로 강제로 사약을 먹게해서 장희빈을 죽게만들었다는 겁니다.

이 내용은 ‘인현왕후전’이라는 소설에 나온 내용입니다. 그런데,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의 ‘숙종실록’에는 장희빈의 죽음과 관련해 전혀 다른 내용이 나온답니다.

숙종이 장희빈에게 무고죄를 물어서 사약을 받으라고 명하자, 장희빈은 세자의 안위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하신다면, 백번이고 천번이고 세자를 위해서 기꺼이 죽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숙종이 세자의 안위를 확실히 지켜주겠다고 굳게 약속을 하자, 장희빈은 숙종이 내린 사약을 순순히 받고, 곧바로 사약을 먹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정사인 ‘숙종실록’에는 장희빈이 사약을 완강히 거부하거나, 발악을 했다는 내용은 전혀 없고, 오히려 장희빈이 세자의 안위를 지켜달라는 당부를 하면서, 숙종이 내린 사약을 순순히 받아먹었고 죽었다는 겁니다.

그런데, 일반대중에게는 정사인 ‘숙종실록’의 기록보다는 소설 ‘인현왕후전’에 나오는 내용만이 널리 알려지면서, 마치 장희빈이 사약을 거부하고 발악하는 내용이 진실인 것처럼 잘못된 인식이 굳어지게된 것입니다.

TV에서 여러번 방영된 드라마 ‘장희빈’에서도 소설 ‘인현왕후전’의 내용을 그대로 인용해서 사약을 마시라는 명에 장희빈이 발악을 하면서 거부하는 모습만 방영되었던 것이지요.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인현왕후전’은 인현왕후를 지지하는 누군가가 허구로 작성한 소설일 뿐이며, 정사인 숙종실록의 내용이 진실에 더 부합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해서 죽게만들었다는 최숙빈의 고변도 최숙빈의 책략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여집니다.

장희빈이 취선당 주변에 신당을 지어놓고 그곳에 무당을 불러들여서 굿을 한 것은 사실입니

다.

장희빈은 몸이 약했던 세자 융이 병에 걸리자, 무당을 불러들여 세자의 병을 낳게하는 굿을 자주 벌였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장희빈이 신당을 지어놓고 굿을 했던 원래의 이유는 세자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서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신당의 굿이 세자가 병에서 완쾌된 후에도 없어지지 않고 계속되었다는 점입니다.

장희빈이 신당에서 굿판을 벌이는 모습이 최숙빈측 사람들에게 목격되었고, 장희빈과 정적관계에 있는 최숙빈이 서인세력과 모의하여, 마치 장희빈이 인현왕후를 저주한 것처럼 편집해 중상모략을 했던 것은 아닐까요?

또한 숙종이 국문을 열고, 장희빈 밑에 있는 궁녀들을 심문해서 인현왕후에 대한 저주굿을 했다는 자백을 받아냈다고 하지만,

국문장에 불려나온 무녀와 궁녀들에게 압슬형 같은 엄청 고통스러운 고문들이 자행되었기에, 고문으로 인한 거짓자백을 이끌어냈을 가능성도 있다고 보여집니다.

조선시대 국문장에는 미리 죄명을 정해놓고 엄청 고통스러운 고문을 가해서 증인으로부터 거짓자백을 이끌어내는 일이 비일비재하게 많이 일어났던 것이 사실입니다.

당시 국문에서 과도한 고문을 가해서, 증거조작이 일어났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장씨가 신당을 차려 굿을 한 것이 정말 인현왕후를 저주하기 위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세자의 쾌유를 빌기 위한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도 큰 의혹거리로 남아있습니다.

사약을 받을 때, 장희빈이 마지막으로 숙종에게 한 말 ‘전하, 저의 죄는 오로지 전하를 사랑한 죄밖에 없습니다!’라는 말이 오랫동안 귓가에 멤돈답니다.

숙종이 장희빈을 사사한 진짜이유는 그녀가 인현왕후를 저주했기 때문이라기 보다는 숙종이 자신의 왕권강화를 위한 책략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숙종은 서인세력의 권력이 강해지면, 자신의 왕권이 약해질 것을 우려해서, 서인의 핵심인물인 인현왕후에게 죄명을 씌워서 퇴출시키는 방법으로 서인세력의 약화를 꾀했고,

반대로 남인세력의 권력이 강해지면, 남인세력의 상징인물인 장희빈에게 죄명을 씌워서 퇴출시키는 방법으로 남인세력의 약화를 꾀했던 겁니다.

따라서, 인현왕후와 장희빈은 모두 숙종과 두 정치세력의 권력게임에 이용당한 정치적 희생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소설 인현왕후전의 내용과는 달리, 장희빈은 숙종을 위해서, 그리고 세자의 안위를 위해서 저항없이 순순히 사약을 받아먹고 죽었습니다. 이것이 조선왕조실록을 통해서 새롭게 밝혀진 사실입니다.

◆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초상화

마지막으로 장희빈과 인현왕후의 초상화를 보여드릴께요!

위의 이미지 중에서 좌측이 장희빈의 초상화이고, 우측이 인현왕후의 초상화입니다.

위의 우측에 있는 그림이 인현왕후의 실제초상화라고 알려진 그림입니다.

초상화를 보면 인현왕후의 실제모습이 오밀조밀하면서 단아하고 예쁜 미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데요.

그동안 우리에게 알려진 데로 어질고 인자한 인현왕후의 모습과 너무나도 잘 맞는 얼굴이네요. 인현왕후는 조선시대에 전형적인 청순미인의 모습 같네요!

그리고 좌측이미지가 장희빈의 초상화인데요. 장희빈의 얼굴은 이목구비가 뚜렷하고 선굵은 미녀의 모습입니다.

장희빈의 얼굴은 눈이 크고 코가 오똑한 것이 전형적인 미인의 모습인데, 실제로 숙종실록의 기록에도 장희빈은 눈에 띄일 만큼 상당한 미인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인현왕후의 얼굴은 매우 인자하고 선한 이미지인데 반해, 장희빈의 얼굴은 두드러지게 예쁘지만, 좀 성격이 강하고 표독스럽다는 느낌이 난답니다.

장희빈은 얼굴이 무척 아름다운 건 사실이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이미지는 야망이나 욕심이 많을 것 같고,

남자를 휘어잡을 만큼 성격이 무척 강하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답니다. 사람의 얼굴이 그 사람의 성격과 내면의 세계를 반영해준다고 하지요.

인현왕후와 장희빈의 초상화에서 그녀들의 성향과 내면세계의 모습을 어느정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장희빈의 초상화는 당대에 그려진 그림은 아니고, 우리나라의 화백이 장희빈의 모습을 재구성해서 그린 초상화라고 하는데, 실제 초상화와 거의 흡사하다고 합니다.

위의 초상화는 울진 불영사에 있는 인현왕후의 은덕을 기리기위해서 그려진 인현왕후의 초상화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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