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나코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과 영화, 사망원인, 남성편력

2022. 6. 5. 23:29연예인 핫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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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나코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과 영화, 사망원인, 남성편력

1929년 11월 12일 ~ 1982년 9월 14일 (향년 52세 사망) 키 169cm

세계적인 미녀스타하면, 여러명의 여배우들이 떠오르지만, 많은 사람들이 한결같이 그 미모를 찬양하는 여배우가 있는데, 바로 그레이스 켈리이지요.

특히 50년대에 허리우드에서 맹활약하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허리우드의 대표적인 미녀스타들이 있었는데, 오드리 헵번과 엘리자베스 테일러, 소피아 로렌, 마릴린 몬로 등이 그 주인공들이지요.

그런데, 엄밀히 말하자면, 50년대에 허리우드를 대표하는 진정한 미녀스타는 누구 뭐라고 해도 바로 그레이스 켈리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우아함의 대명사’라고 말할 정도로, 50년대 허리우드의 가장 우아한 미녀스타로 큰 각광을 받았답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우아하고 기품있는 외모와 세련된 스타일로 유명했으며, 깊고 푸른눈과 오똑한 콧날, 앵두같은 입술, 그리고 너무나도 멋진 금발의 웨이브머리결 등

너무나도 흠잡을 데 없는 완벽한 이목구비를 갖추고 있어서, 당대 가장 완벽한 미인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허리우드의 최고 미녀스타였습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레이스 켈리는 지금 활동하는 허리우드 여배우들보다도 훨씬 더 예뻤고, 당대에 함께 활동하던 여배우들 중에서 미모면에서 단연 원톱으로 인정받았던 전설적인 미녀여배우랍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1951년도에 데뷔해서 1956년도까지 딱 6년 동안만 영화배우로 활동했는데요.

그녀는 단 6년동안 배우로 활동하면서 ‘하이눈’ ‘모감보’ ‘이창’ ‘나는 결백하다’ ‘상류사회’ 같은 세기적인 걸작품에 출연하면서, 아름다운 미모와 개성짙은 연기력으로 큰 인기를 끌면서 세계적인 톱스타로 우뚝 올라서게 되었답니다.

1특히 그레이스 켈리는 영화 ‘모감보’에서 당대의 미남스타 크라크 게이블과 환상적인 연기호흡을 이루면서,

남편과 미남사냥꾼 사이에서 고뇌하고 갈등하는 유부녀역할을 너무도 실감나게 훌륭히 소화해낸 그 뛰어난 연기력으로 세계의 수많은 관객들로부터 대단한 찬사와 호평을 받았답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영화 데뷔 3년만이 1954년도에 영화 ‘갈채’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하는 영광을 누리게 됩니다.

대부분의 배우들이 평생 한번도 수상해보지도 못하는 아카데미 주연상을 그레이스 켈리는 그녀 특유의 뛰어난 연기력을 인정받으면서, 영화 데뷔 3년 만에 수상하는 엄청난 쾌거를 이루게 된답니다.

이렇게 혜성처럼 나타나서 탁월한 연기력과 빼어난 미모로 온통 허리우드영화계를 주름잡고다니던 그레이스 켈리는 1956년 모나코의 왕 레니에 3세와 전격 결혼식을 올리면서, 영화계를 은퇴하게됩니다.

혜성처럼 나타나 ‘하이눈’ ‘모감보’ ‘갈채’ ‘백조’ 같은 불후의 명작품들을 남겨놓은 허리우드의 최고미인 그레이스 켈리는 고작 28살의 나이에 결혼과 함께 영화계를 완전 은퇴함으로써, 세계의 수많은 팬들에게 커다란 아쉬움과 미련을 남겨놓았답니다.

♥ 그레이스 켈리, 레니에 3세와 세기적인 결혼식, 영화계 은퇴

그레이스 켈리는 1956년 4월 18일 모나코의 니콜라스대성당에서 모나코의 왕 레니어 3세와 초호화로운 결혼식을 올렸고, 이 결혼식을 전세계에 생중계함으로써, 결혼식자체가 전세계적으로 큰 화제가 되었답니다.

그레이스 켈리를 처음 보고 홀딱 반한 모나코의 왕 레니에 3세는 1년 동안 그녀를 찾아가면서 그녀에게 청혼을 했다고 하는데요.

레니에 3세가 그레이스 켈리에게 청혼하면서 주었던 선물은 12캐럿짜리 다이아몬드반지였다고 하며, 이 다이아몬드의 가격은 무려 452억원이라고 합니다.

혹시, 그레이스 켈리가 레니에 3세가 프로포즈하면서 선물로 준 이 12케럿짜리의 값비싼 다이아몬드반지 때문에, 결혼에 승낙한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가 처음 만나게된 계기가 따로 있습니다.

 

프랑스의 '파리마치'라는 잡지의 편집장은 그레이스 켈리를 모델로 해서 화보촬영을 기획했는데, 그 화보찰영지로 선택했던 곳이 바로 모나코왕궁이었습니다.

잡지화보로 쓰일 사진을 만들기 위해서 1955년 모나코왕궁에서 화보촬영이 진행되면서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는 자연스럽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 때, 그레이스 켈리를 보고 첫눈에 홀딱 반한 레니에 3세는 그 후 1년동안 그녀에게 열띤 구애를 하였으며, 마침내 두사람은 1956년 4월에 세기적인 결혼식을 올렸고, 이 결혼과 함께 그레이스 켈리는 영화계에서 완전 은퇴하고 말았답니다.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의 결혼식의 식전 축가행사만 일주일동안 진행되었을 정도로 호화롭고 성대한 결혼식이었고,

두사람의 결혼식은 인공위성으로 전세계로 생중계되었으며, 전세계의 3,000만명 이상이 이 성대한 결혼식을 시청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의 결혼식은 단지 한 개인의 결혼식이 아니라, 수천만명의 전세계인들에게 생중계된 세계적인 빅이벤트였던 겁니다.

특히 이 결혼식에서 최대이슈는 그레이스 켈리의 순백의 웨딩드레스였다고 합니다.

이 결혼식에서 그레이스 켈리가 입었던 웨딩드레스는 50년을 시간을 뛰어넘을 정도로 세련되고 우아한 최첨단 트렌드의 웨딩드레스였고, 역대 허리우드여배우들이 입은 웨딩드레스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드레스로 손꼽히는 웨딩드레스라고 합니다.

그레이스 켈리의 웨딩드레스는 그 기품있고 세련된 문양과 디자인으로 보는 이들의 눈을 훼둥그렇게 만들 정도로 황홀하고 아름다운 순백의 웨딩드레스로, 지금까지도 유행하고 있는 드레스라고 합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역대 여배우들이 입었던 드레스 중 가장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를 입고나와 전세계인들을 깜짝 놀라게 만들었답니다.

후대에 미란다 커나 케이트 미들턴 같은 연예인들이 그녀의 웨딩드레스와 똑같은 문양의 드레스를 따라입었을 정도로, 그레이스 켈리의 웨딩드레스는 그야말로 파격적이었고, 아름다움의 극치였습니다.

그레이스 켈리의 이 아름다운 웨딩드레스는 MGM의 전문 의상디자이너 헬렌 로즈가 디자인했고, 34명의 재봉사가 6주에 걸쳐서 90m 길이의 실크를 재료로 작업한 끝에 만들어진 초호화 드레스라고 합니다.

그레이스 켈리의 이 웨딩드레스 가격은 그 당시 가격으로 7억원이라고 하니, 얼마나 고급스럽고 값비싼 웨딩드레스인지를 실감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어 3세의 결혼식은 짜여진 각본이자 정략결혼, ‘음모론’의 실체

그런데,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어 3세의 이 화려한 결혼식이 누군가에 의해서 잘 짜여진 각본이였다는 ‘음모론’이 피어오르고 있습니다.

이렇게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만들 정도로 레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가 초호화결혼식을 한 것이 모두 사전에 잘 짜여진 각본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레니어 3세와 그레이스 켈리가 진짜로 사랑해서 결혼한 것이 아니라, 다른 목적 때문에, 사전에 미리 의도적으로 만든 각본에 의해서 결혼한 것이라는 얘기이지요.

모나코는 원래 프랑스에 속한 프랑스의 한 공국이었다가 간신히 독립한 나라였는데, 당시 모나코는 재정적으로 매우 열악했고, 경제도 파탄난 상태라 프랑스에로 다시 합병될 위기에 처한 상태였습니다.

프랑스정부는 레니에 3세에게 앞으로 모나코가 재정적자를 극복하지 못하고, 경제를 호전시키지 못한다면, 모나코를 합병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왔습니다.

그렇지만, 레니에 3세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반드시 모나코를 프랑스의 종속상태에서 벗어나서, 독립국가를 만들려는 의도를 갖고있었습니다.

레니에 3세는 프랑스정부에 모나코 독립국가 승인을 강력히 요구했고, 프랑스정부는 모나코의 독립국가 승인을 위해서 다음과 같은 조건을 갖출 것을 요구해왔습니다.

프랑스정부는 레니에 3세에게 모나코가 현재의 재정적자 상태에서 재정흑자로 전환하고, 경제성장을 이룩함과 동시에, 대를 이을 수 있는 왕자를 출산하는 경우에만 모나코의 독립국가를 인정할 수 있다는 겁니다.

그렇지만, 그 당시 모나코의 재정상태는 매우 나빴으며, 경제적으로도 거의 파탄난 상태였고, 대를 이을 자녀도 없던 상황이라, 레니에 3세는 크게 고심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레니에 3세는 그리스의 선박왕 애리스토틀 오나시스를 비밀리에 만나서 해결책을 찾기위한 논의를 하게되었는데요.

오나시스는 100척의 화물선을 보유한 그리스의 성공한 사업가이자, 재클린 케네디의 남편으로 유명한 사람입니다.

케네디대통령이 사망한 후, 케네디의 미망인이었던 재클린이 오나시스와 재혼해서 부부가 된 사이이지요.

오나시스는 모나코의 독립국가 승인을 원하는 레니에 3세에게 다음과 같은 좋은 묘안을 제안했습니다.

먼저, 세계적으로 명성이 높은 허리우드의 미녀여배우를 섭외해서, 그녀에게 값비싼 선물로 주고, 구워삶아서 그녀와 결혼을 하라는 겁니다.

그리고, 그 허리우드 여배우와 초호화결혼식을 올리는 장면을 전세계에 생중계함으로써, 모나코가 자연절경이 아름다운 최고의 관광지임을 적극 홍보하라는 것이지요.

그리고 모나코에 카지노를 설치해서 미국과 유럽의 부호들을 적극 유치해서 관광수입의 증대를 도모하라는 겁니다.

이같은 오나시스의 제안을 받아들인 레니에 3세는 사전에 치밀하게 각본을 짠 후, 당시 허리우드에서 큰 인기를 끌면서 크게 각광을 받고있던 미녀여배우 그레이스 켈리를 타킷으로 삼고, 그녀에게 접근해서 공작을 벌임으로써 결국 결혼에 성공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레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가 처음에 만나게된 계기가 된 화보촬영은 레니에 3세와 프랑스 잡지편집장이 서로 사전에 짠 각본에 의한 공작이었다고 합니다.

레니에 3세가 프로포즈하면서 그레이스 켈리에게 선물로 12캐럴짜리 다이아몬드를 선물로 준 것도, 사전에 짜여진 각본이라고 합니다.

아뭏튼 오나시스가 만들어준 각본대로 레니에 3세는 그레이스 켈리와의 결혼하는데 성공했고,

그 후 지중해의 빈국이었던 모나코는 수많은 유럽사람들이 관광을 즐기기 위해서 찾는 유럽의 인기좋은 관광국가로 탈바꿈하게 된답니다.

레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의 결혼식이 전세계에 생중계되면서, 세상에 전혀 알려지지않았던 모나코라는 나라가 천혜의 아름다운 자연풍광을 자랑하는 관광명소로 세상에 널리 알려지는 엄청난 홍보효과를 거두었고, 모나코는 일약 유럽 최고의 관광국가로 거듭나게된 것이지요.

허리우드의 최고미녀스타 그레이스 켈리와의 초호화 결혼식을 치른 후,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들을 유치하는데 성공한 모나코는 만성적인 재정적자를 극복하고, 경제부흥을 이룩하게 된답니다.

이로써, 레니에 3세의 소원대로 모나코는 프랑스에 귀속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답니다.

결국 오나시스의 계략대로, 레니에 3세는 허리우드의 최고미녀여배우 그레이스 켈리의 명성을 이용해서, 결혼도 하고, 나라도 부강하게 만들고, 또한 프랑스로부터 독립국가 지위도 승인받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일석삼조의 효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레니에 3세가 그레이스 켈리와 결혼한 것은 그녀를 진정으로 사랑해서라기 보다는, 모나코를 독립국가로 만들기 위한 정략결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음모론자들이 주장하는 레니에 3세와 그레이스 켈리 결혼식의 음모론입니다. 이 음모론이 전혀 뜬금없는 것은 아니고, 그 당시의 상황으로 볼 때, 어느정도 일리가 있다고 보여집니다.

이렇게 모나코의 왕 레니에 3세와 결혼한 그레이스 켈리는 몇 년 후 장녀 카롤린과 외아들 알베르 2세, 차녀 스테파니 등 1남 2녀를 낳아 기르면서 안정적인 결혼생활을 이어나갔습니다.

♥ 모나코왕비 그레이스 켈리의 의문스러운 죽음, 사망원인

그리고 1982년 9월 13일, 모나코왕비 그레이스 켈리는 둘째딸 스테파니와 함께 자동차를 몰고 모나코왕궁으로 가던 중, 석연치않은 교통사고로 인해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사망하게 된답니다.

모나코왕비 그레이스 켈리는 산악도로를 달리던 중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37 m 절벽에서 떨어지면서, 52세의 나이에 안타까운 죽음을 당하고맙니다.

원래 그레이스 켈리는 프랑스 록아젤에 있는 가족별장에서 가족들과 휴가를 보낸 후, 1982년 9월 13일 오전 9시경, 둘째딸 스테파니를 차에 태우고 직접 자동차를 몰아서 모나코궁으로 출발했습니다.

그레이스 켈리가 탄 차가 모나코궁으로 가는 길은 매우 가파르고 험난한 산악도로였는데, 이 산악도로에서 그녀가 타고가던 자동차가 갑자기 방향을 잃고, 37m 아래의 산비탈로 추락하고 말았습니다.

이 추락으로 그레이스 켈리는 큰부상을 입고 혼수상태에 빠졌는데, 그녀와 같이 타고있던 딸 스테파니는 간신히 살아났다고 합니다.

병원으로 옮겨져 혼수상태에 있던 그레이스 켈리는 그 다음날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그레이스 켈리의 교통사고에 있어서, 몇가지 미스테리한 부분이 있습니다.

그레이스 켈리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곧바로 구급대가 오지않고 오랫동안 방치되었다고 합니다.

또한 교통사고가 난 후, 현장에 있던 자동차와 유품들이 곧바로 치워져서 증거물을 모두 없앴다고 하는 점도 의문점입니다.

그리고 경호요원들이 자동차를 모는 것이 정상인데, 모나코왕의 왕비인 그레이스 켈리가 직접 자동차를 몰았다는 점도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교통사고로 그레이스 켈리는 사망했지만, 함께 차에 타고있던 둘째딸 스테파니는 경미한 타박상만 입고, 무사했다는 점도 의문점입니다.

일각의 주장에 따르면, 이것은 단순한 교통사고가 아니라, 모나코왕실에서 의도적으로 꾸민 음모에 의해서 그레이스 켈리가 죽임을 당한 것이라는 음모론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만일 진짜로 교통사고가 일어나서, 그레이스 켈리가 사망한 것이라면, 옆에 타고있던 스테파니공주도 함께 사망하는 것이 정상이라고 봅니다.

37m의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도, 그레이스 켈리만 죽고, 함께 타고있던 스테파니공주는 경미한 부상만 입은 체 살아남았다는 것은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며,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레이스 캘리의 죽음과 관련해서 또다른 의문점들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레이스 켈리가 교통사고를 당한 후, 한 병원으로 옮겨졌는데, 그 병원에는 그레이스 켈리를 치료할 치료장비가 제대로 갖춰져있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레이스 켈리가 자동차를 운전했고, 조수석에 둘째딸 스테파니가 타고있었다고 발표했는데요.

절벽 아래로 떨어진 그 자동차의 운전석부분은 거의 파손되지 않았고, 조수석부분은 완전히 박살나 있었다고 합니다.

멀쩡한 스테파니공주가 앉아있던 조수석은 완전 박살이 났고, 사망한 그레이스 켈리가 앉아있던 부분은 거의 파손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것이 전혀 말이 안되는 부분입니다. 이와같은 모순점과 의혹점들 때문에, 음모론이 힘을 얻는 이유랍니다.

이날 원래 그레이스 켈리는 조수석에 앉아있었고 스테파니가 자동차를 몰았는데, 교통사고가 난 후,

운전면허증이 없었던 스테파니공주가 처벌당하는 것을 막기위해서 마치 그레이스 켈리가 운전을 한 것처럼 모나코왕실에서 꾸몄다는 음모론도 제기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더욱 놀랄만한 결정적인 의혹점이 있는데요. 교통사고간 난 후, 그레이스 켈리는 곧바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36시간 동안 혼수상태로 살아있었다고 합니다.

즉, 교통사고가 난 후, 병원으로 옮겨진 그레이스 켈리는 그 다음날 오후까지도 죽지않고 살아있었는데요.

교통사고간 난 지 36시간이 지난 시점에, 남편 레이니 3세는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그레이스 켈리의 생명유지장치를 끊어버리도록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결국 생명유지장치를 끊음으로써, 그레이스 켈리는 숨을 거두었다고 합니다.

이 점도 매우 의문스러운 부분이 아닐 수 없는데요. 아니 자신이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부인이 교통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져있으면, 의료행위를 계속 진행해서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노력하는 게 정상인데,

사고를 당한 지 고작 36시간 만에 생명유지장치를 끊어서 죽게 만들었다고 하는 사실이 믿겨지지않습니다.

서양에서는 혼수상태에 빠진 남편을 10년이 넘도록 돌보고 있는 배우자들도 많이 있고, 또 어떤 사람은 10년동안 식물인간으로 누워있다가, 10년 후에 의식이 회복되어서 다시 정상인으로 돌아온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레이스 켈리가 혼수상태에 빠진 후, 고작 36시간이 지난 시점에서, 그녀의 산소호흡기를 떼어 죽게 만든 사실은 너무 성급한 선택이었으며, 모나코왕실의 조직적인 음모공작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하다고 봅니다.

이처럼, 그레이스 켈리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모나코왕실에서 취한 석연치않은 행동 때문에, 그녀의 죽음과 관련된 음모론이 더욱 기승을 부리게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사실 그레이스 캘리는 레니에 3세와 결혼한 후, 그다지 행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사실 배우라면, 꿈도 많고 어딘가에 속박되지않고 자유롭게 여러나라를 여행다니면서 자유롭게 사는 것을 꿈꾸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런데, 그레이스 켈리는 레니에 3세와 결혼한 후, 완전히 왕궁안에 갇혀서 속박된 생활을 해왔습니다.

마치 하늘을 자유롭게 날던 새가 어느날 갑자기 새장에 갇혀서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된 것과 똑같은 상황이지요. 이렇게 새장에 갇힌 새는 결코 오래 살지 못하다고 단명한다고 합니다.

더욱이 모나코왕실의 법도와 예법이 무척 완고하고 까다롭다고 소문나 있는데, 평생 배우로서 자유롭게 살아왔던 그레이스 켈리는 이러한 엄격한 왕실법도에 잘 적응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모나코왕실은 프랑스어를 사용했는데, 프랑스어를 전혀 사용할 줄 몰랐던 그레이스 켈리는 오직 영어만 사용했기 때문에, 왕실사람들과의 의사소통이 원활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모나코왕실에 잘 적응하지못했던 그레이스 켈리는 시부모님과 시댁식구들과도 사이가 안좋았다고 합니다.

더욱이 레니에 3세는 성격이 까다롭고 비위 맞추기 어려운 독불장군 스타일이었기 때문에, 나중에 그의 성격을 알게된 그레이스 켈리는 남편과의 성격차이로 인해 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행도 제대로 다니지못하고, 친구도 제대로 만나지못하는 속박된 생활속에, 매일같이 까다로운 궁중법도를 준수해야하는 엄격한 궁중생활 때문에,

자유롭고 분망한 성격을 가진 그레이스 켈리는 더더욱 궁중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면서, 심한 우울증 증세까지 생겼다고 합니다.

더욱이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의 부부관계도 별로 좋지않았다고 합니다.

결혼한 지, 몇 년 후부터 그레이스와 레니에는 각자 바람이 났다는 소문이 났을 정도로 사이가 안좋았다고 합니다.

작가 그웬 로빈슨의 말에 따르면, 그레이스 켈리와 레니에 3세는 겉으로만 부부처럼 행동했을 뿐, 실제로는 무늬만 부부였을 뿐 서로간에 애정이 없는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이것은 레니에 3세가 그레이스 켈리와 사랑이 아닌 전략적 판단에 의한 정략결혼을 했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난 것이 아닌가 사료됩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지인들에게 자신이 레니에와 결혼한 것을 가장 후회한다는 말을 자주 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레니에가 자신을 별로 사랑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까다롭고 엄격한 궁중법도, 모나코왕실의 속박되고 자유롭지 못한 생활, 그리고 허리우드영화 배우시절을 잊지못하는 그리움과 향수 때문에, 그레이스 켈리는 심한 우울증에 걸렸고, 정신적으로 점점 쇠락해갔습니다.

특히, 그레이스 켈리는 미국 허리우드를 무척 그리워했다고 하며, 좁은 왕궁생활에 무척 답답함을 느끼고, 오랫동안 적응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특히, 그녀는 자신이 다시 영화배우로 컴백할 것을 학수고대해왔는데, 그녀의 남편 레니에 3세와 모나코왕실의 결사적인 반대로 그 뜻을 이루지못한 것 때문에, 그녀는 더욱 큰 실의에 빠지게 된 것입니다.

이런 향수병과 우울증 때문에, 그녀는 술과 약물에 중독되어 매일같이 술과 약물에 의존하면서 살아갔다고 합니다.

극심한 알콜중독, 약물중독에 빠졌던 그레이스 켈리는 이러한 암울한 현실을 잊기 위해서였는지, 수시로 파티를 열어서 여러명의 젊은 남성들을 만나서 핑크빛 염문을 뿌렸습니다.

♥ 그레이스 켈리의 남성편력

특히 그녀는 40대 후반 때에, 아이들 교육 때문에 파리에 임시거처를 마련했는데, 그곳 파리는 중년의 그레이스 켈리에게는 젊고 멋진 남성들과 만날 수 있는 최적의 장소가 되었습니다.

파리에서 그레이스 켈리는 파티에서 만나 알게된 페르 맷슨이라는 33세의 스웨덴 배우를 자기호텔방으로 초청해 깊은 관계를 가진 적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파리의 아지트는 모나코왕실의 통치권이나 감시가 전혀 미치지않는 곳이었기 때문에, 그곳에서 그녀는 수많은 젊은 남자들과 만나 정사를 즐겼습니다. 

원래 그레이스 켈리는 청순하게 생긴 외모와는 달리 허리우드영화배우 시절에도, 남성편력이 대단했다고 합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배우로 활동했던 당시에, 게리 쿠퍼, 클라크 게이블, 레이 밀랜드, 빙 크로스비, 윌리엄 홀든, 등과 염문을 뿌렸는데, 이들은 대부분 그레이스 켈리가 영화를 함께 촬영했던 남자배우들이라고 합니다.

또한 그레이스 켈리는 이란의 왕 팔레비 2세와 당대 최고의 바람둥이 프랑크 시나트라, 말론 브란도와도 염문을 뿌렸으며, 이외에도 여러명의 남자들과 염문을 뿌렸다고 합니다.

특히 그레이스 켈리는 영화 ‘다이얼 M을 돌려라’의 상대 남성배우 레이 밀랜드와도 스캔들을 뿌렸는데, 레이 밀랜드는 그녀보다 무려 22살이나 더 많은 선배배우였다고 하는데요.

레이 밀랜드의 부인은 자신의 남편과 염문을 뿌리고다니는 그레이스 켈리를 파멸시키기 위해서 여러가지 시도를 했는데, 하마터먼 이 시기에 그레이스 켈리가 배우로서 생명이 끝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녀의 소속사 MGM사에서 이제막 스타덤에 오른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서 갖은 노력을 다해서 간신히 무마되었다고 합니다.

그레이스 켈리가 클라크 게이블, 게리 쿠퍼, 빙 크로스비 등 유독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많은 남성들과 데이트를 즐겼던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콤플렉스 때문이라고 보여집니다.

그레이스 켈리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무척 좋아했지만, 아버지로부터 거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고 하며,

아버지 뻘인 나이 많은 남자들에게서 더욱 더 사랑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이같이 나이 많은 남자배우들과 스캔들을 많이 뿌리고다닌 것이라고 합니다.

그레이스 켈리의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그레이스 켈리가 결혼할 상대라면서 집에 데리고온 남자들이 무려 50명이나 된다고 합니다.

아뭏튼 그레이스 켈리는 겉으로 보여지는 청순한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 생활에서는 남성편력이 대단한 여성이었다고 합니다.

결혼후, 향수병과 우울증 잊기위해서 시작한 알콜과 약물복용, 그리고 알콜과 약물중독에 빠진 그녀는 여러명의 젊은 남자들과 염문을 뿌리면서 모나코왕비로서의 품위를 잃어갔고, 이젠 그녀는 모나코왕실에 사고만 치고다니는 골치아픈 존재감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모나코에 수많은 관광객들을 끌어들이는 홍보대사로서의 품위를 완전 상실한 그레이스 켈리를 더 이상 그냥 두고볼 수 없었던 모나코왕실은 그녀를 제거할 음모를 꾸몄고, 교통사고를 위장해서 그녀를 죽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그레이스 켈리 사망의 음모론인데, 과연 그레이스 켈리 사망의 음모론은 사실일까요?

영국작가 로버트 레이시는 그레이스 켈리가 모나코왕실의 의해서 살해당했다는 음모론을 주장하고 있지만, 현재로서는 그레이스 켈리가 정말로 모나코왕실의 음모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다고 단정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는 없습니다.

음모론은 어디까지나 음모론이며, 그레이스 켈리의 진짜 사망원인은 여전히 베일속에 가려져 있으며, 그녀의 진짜 사망원인은 그녀의 남편 레니에 3세와 왕실사람 몇명만 알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그사람들 모두 지금은 사망하고 없습니다.

그녀는 모나코왕실의 음모에 의해서 죽임을 당했을까요? 아니면 단순한 교통사고에 의해서 사망했던 걸까요?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배우로 칭송을 받았던 그레이스 켈리였지만, 그녀가 이 세상에 가장 아름다운 마음씨를 가진 여배우는 아니였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 수 있었습니다.

세계적인 여배우로서, 그리고 모나코의 왕비로서 겉으로는 화려한 삶을 살아갔던 그레이스 켈리였지만,

그녀는 허리우드에 대한 향수와 그리움, 우울증 때문에, 실제 생활에서는 술과 약물에 찌든 불행한 삶을 살아갔던 비운의 왕비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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