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허리우드 미남배우 클라크 게이블의 영화와 사랑, 부인 케롤 롬바드의 사망

2021. 7. 5. 20:36연예인 핫이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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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우드배우 클라크 케이블의 영화, 부인 케롤 롬바드와의 사랑과 사망이유, 히틀러의 체포명령

클라크 게이블은 20세기 초 중반기에 영화배우로 활동하면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허리우드의 위대한 톱스타이지요.

클라크 게이블은 미국 허리우드의 무성영화시절부터 활동했을 뿐 아니라, 40,50년대에 허리우드영화의 전성기시절에 ‘할리우드의 제왕’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대단한 활약을 펼치면서 큰 인기를 끌었던 허리우드영화의 레전드같은 존재감이랍니다.

특히 클라크 게이블은 39년도의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출연해서 비비안 리와 함께 불세출의 명연기를 선보임으로써 영화의 세계적인 흥행성공을 이끌어내는데 큰 기여를 했던 명배우랍니다.

이 영화에서 클라크 게이블은 미국 남북전쟁의 암울한 위기의 시대를 꿋꿋하게 버텨내는 강인한 미국인상의 역할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답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1917년도부터 무성영화에 단역배우로 활동하다가 1930년대에 본격적인 배우활동을 시작하게 됩니다.

그는 1939년도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로 일약 세계적인 스타덤에 오르게 되며, 이때부터 엄청난 인기와 스타쉽, 탄탄한 커리어, 잘생긴 외모를 자랑하면서 고전허리우드를 대표하는 미남배우로 큰 인기를 끌어나가게 됩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1934년도 영화 ‘어느 날 밤에 생긴 일’에 출연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수상하면서 연기력까지 인정받았고,

그 후 ‘바운티 호의 반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샌프란시스코’ ‘붐 타운’ ‘모감보’ 등 여러편의 걸작품에 출연해 큰 인기와 명성을 떨쳤던 허리우드의 최고의 미남배우였답니다.

그런데, ‘서프라이즈’를 통해서 클라크 케이블과 관련된 숨겨져왔던 비화가 알려져서 화제가 되고있답니다.

클라크 게이블이 가장 사랑했던 여인 케롤 롬바드와의 사랑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와 2차세계대전 당시에 영화를 무척이나 좋아했던 아돌프 히틀러가 내렸던 클라크 게이블 체포공작에 관련된 일화도 함께 소개해드리도록 하겠어요.

◆ 클라크 게이블이 사랑했던 아내 케롤 롬바드의 사망

1942년 클라크 게이블은 인기절정의 시기에 느닷없이 자원해서 공군에 입대하게 됩니다.

허리우드의 대표적인 미남배우로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그가 왜 갑자기 미공군에 자원해서 입대했을까요?

많은 사람들은 클라크 게이블이 공군에 자원입대해서 공군조종사가 된 이유를 매우 궁금해했답니다.

클라크 게이블이 느닷없이 공군에 자원입대해서 전쟁터로 뛰쳐나갔던 이유는 다름아닌 그가 사랑했던 아내 케롤 롬바드 때문이었지요.

클라크 게이블은 전성기였던 30~40년대에 세계적으로 폭발적인 인기를 끌고 있었던 미남스타였고, 당연히 그의 주변에 수많은 여성들이 꼬여들었답니다.

그는 총 다섯 번의 결혼식을 올렸을 정도로 여성편력이 화려했습니다. 클라크 케이블은 그의 무명시절에 자신에게 연기지도를 해주었던 14살 연상의 조세핀 달런과 첫 번째 결혼을 했답니다.

클라크 케이블은 자신이 태어나기 전에 사망한 어머니의 사랑에 많은 결핍을 느끼고 있었는데, 어머니처럼 자애로운 대해준 조세핀 달런에게 진한 모성애를 느끼면서 그녀에게 마음을 빼앗겼기 때문이지요.

그녀와의 결혼은 오래가지 못했고, 클라크 게이블은 갑부에다 사교계의 여왕인 17세 연상의 리어 랭험과 두 번째 결혼식을 올렸는데,

그녀는 엄청난 자금과 인맥을 동원해 무명의 클라크 게이블을 톱스타로 끌어올리는데 큰 수훈을 세웠던 일등공신이었답니다.

두 번째 부인 리어 랭험의 재력과 로비 덕분에 무명인 클라크 게이블은 스타덤에 오르게 된답니다.

허리우드의 톱스타가 된 클라크 게이블은 주변에 수많은 여성들이 따라붙었고, 그는 존 크로포드, 로제타 영 등의 허리우드의 미녀여배우들과 진한 염문을 뿌리면서 허리우드의 바람둥이배우라는 꼬리표까지 붙게된답니다.

이처럼 클라크 게이블이 숱한 여배우들과 염문을 뿌린 것은 어린 시절 느껴보지못했던 어머니의 사랑결핍으로 인한 허전한 마음을 채우기 위해서였다고 합니다.

클라크 게이블의 어머니는 그가 태어나던 1살 때에 사망했기 때문에, 그는 어머니의 사랑에 매우 목말라하고 있었습니다.

이같이 클라크 게이블이 여러명의 여자와 결혼과 이혼을 반복하고, 여러명의 여배우들과 숱한 염문을 뿌렸던 이유는

어린시절 어머니의 사랑결핍으로 인한 마음의 허전함을 채워줄 수 있는 여성을 찾고있었기 때문이랍니다.

결국 두 번째부인과도 이혼한 클라크 게이블은 그가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진짜 모성애를 느끼게 해주는 여인 한명을 운명처럼 만나게 된답니다.

바로 1930년대의 대표적인 미녀여배우인 케롤 롬바드입니다.

다른 여성들이 채워주지 못했던 클라크 게이블의 마음속의 허전함과 사랑의 결핍을 캐롤 롬바드로 인해 채울 수 있었고, 캐롤 롬바드 이야말로 어머니 같은 진정한 모성애를 느끼게 해준 유일한 여성이었답니다.

케롤 롬바드는 ‘사느냐 죽느냐’ ‘마이맨 갓프리’ ‘스미스부부’ 같은 30년대의 걸작품에 출연했던 미모와 연기력을 모두 갖춘 30년대의 최고의 매력적인 여배우였답니다.

1930년대 후반 클라크 게이블은 여배우 캐롤 롬바드와 영화 ‘그녀의 남자는 없어’에 함께 출연하면서, 두사람간 첫만남이 이루어졌는데, 그 당시 두사람 모두 부인과 남편이 있는 유부남, 유부녀였답니다.

그렇지만, 클라크 게이블은 첫눈에 반한 여배우 캐롤 롬바드에게 적극적으로 청혼을 하였고, 결국 1939년도에 두사람은 자신의 배우자와 이혼한 후에 재혼하게 됩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당신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낀 진정한 사랑’이라고 캐롤 롬바드에게 고백했고, 그녀는 그의 진정어린 프로포즈를 받아들였던 겁니다.

유부남, 유부녀였던 두사람이 열애에 빠졌을 때, 언론의 강도높은 비판이 가해졌고,

클라크 게이블과 캐롤 롬바드는 자신들의 배우자와 이혼한 후, 정식으로 재혼함으로써, 두사람은 정식부부가 되었답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세 번째로 결혼한 캐롤 롬바드를 끔찍이도 사랑했고, 그녀에게서 진정한 사랑과 모성애를 느꼈다고 합니다.

유명한 바랑둥이였던 클라크 게이블이 임종의 순간에도 한없이 그리워했던 사람은 바로 캐롤 롬바드 한 여인뿐이었다고 합니다.

클라크 게이블과 캐롤 롬바드는 꿈같은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해나가게 됩니다.그런데,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이란 말인가! 신은 진정 두사람의 꿈같은 결혼생활을 질투했단 말인가!~

클라크 게이블과 캐롤 롬바드의 행복한 결혼생활은 3년만인 1942년도에 산산조각이 나고만답니다. 캐롤 롬바드의 예상치 못했던 비행기 추락사고로 두사람의 결혼은 끝나고 됩니다.

당시는 1942년도 제2차세계대전이 한창 진행되던 시기였고, 미국정부는 막대한 전쟁비용을 충당하기 위해서 대거 허리우드 배우들을 동원해 전쟁자금을 모집하는 전쟁채권 이벤트를 자주 개최했답니다.

클라크 게이블의 아내 캐롤 롬바드도 정부에서 개최하는 전쟁채권 모집행사에 참석한 후, 돌아오는 비행기에 탔다가 그만 그 비행기가 LA의 한 야산에 충돌하는 추락사고가 발생하고만 것입니다.

이 비행기추락사고로 탑승자 전원이 모두 사망하고 말았고, 그 비행기에 타고있던 캐롤 롬바드도 당연히 숨지고 말았답니다.

마침 그 날이 결혼 3주년이 되는 날이었기 때문에, 클라크 게이블은 결혼 3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성대한 파티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아내가 비행기추락사고로 사망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듣고 말았답니다.

캐롤 롬바드는 35세 꽃다운 나이에 비행기사고로 사망하고 말았고, 그 때문에 클라크 게이블과의 결혼생활은 3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됩니다.

끔찍이 사랑했던 부인 케롤 롬바드의 뜻밖의 사망으로 인해 엄청난 충격을 받은 클라크 게이블은 그 후 너무도 마음의 상심이 컸던 나머지 몸무게 9kg이나 빠졌을 뿐만아니라, 결국 알콜중독에 빠졌고, 두문불출 집안에서 은둔생활을 하게 됩니다.

◆ 클라크 게이블의 공군입대와 2차세계대전 참전, 히틀러의 체포공작

그러던 어느날, 클라크 게이블은 심경의 변화를 일으키고 돌연 영화배우를 은퇴하고, 미공군에 자원입대를 하게됩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42살의 나이에 뜻밖에도 공군에 자원입대를 신청했는데, 처음에는 미공군에서 그의 입대신청을 거부했답니다. 나이가 너무 많다는 이유로 ~

그렇지만, 클라크 게이블은 계속해서 공군에 자원입대를 신청했고, 결국 루즈벨트대통령의 승인하에 그는 미공군 조종사로 입대하게 됩니다.

미공군에 입대하여 3개월동안 고된 훈련을 통해 비행기조종술을 배운 후, 클라크 게이블은 소위로 임관되어 전쟁터로 배치된답니다.

실제로 클라크 게이블은 공중촬영과 기관총사수의 보직을 받고 전장터에 나가게 됩니다.

그렇다면, 클라크 게이블은 무슨 이유로 스스로 자원해서 전장터로 비행기를 몰고간 것일까요?

전쟁터에 배치된 후, 클라크 게이블은 종종 혼자서 비행기를 몰고서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는데요.

클라크 게이블이 비행기를 몰고간 곳은 바로 자신의 부인 케롤 롬바드가 탄 비행기가 추락했던 그 지역이었다고 겁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전장터에 배치된 후에도 종종 혼자서 자신의 부인 케롤 롬바드가 탔던 비행기 추락현장에 다녀왔던 것이고, 그곳에 착륙해서 무엇인가를 찾아 헤맸다고 합니다.

그리고 어느날 클라크 게이블이 비행기 추락현장에 내려 찾아냈던 것은 부인 캐롤 롬바드가 두르고있던 스카프였다고 합니다.

클라크 게이블이 영화배우를 은퇴하고, 공군조종사로 자원입대한 이유는 자신이 진정으로 사랑했던 아내 캐롤 롬바드의 흔적과 유류품을 찾기 위해서였던 겁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자신이 진실로 사랑했던 부인 캐롤 롬바드가 불의의 비행기사고로 사망하자, 그녀를 잊지못하고, 캐롤 롬바드가 추락했던 사고지점을 찾아 헤매인 끝에, 결국 그녀가 생전에 가장 아꼈던 스카프를 찾아냈던 겁니다.

천하의 바람둥이인 줄 알았던 클라크 게이블에게서 이런 순정파같은 면모가 있었다고 하니, 정말 감동적이고 놀라울 따름입니다.

자신이 영화배우로서 인기절정의 시기에 있었지만, 스스로 톱스타의 지위를 내려놓고, 공군조종사로 자원입대했던 것은 아내 캐롤 롬바드를 향한 지고지순한 그의 사랑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클라크 게이블이 스스로 말했던 것처럼, 그에게 진정한 사랑을 눈뜨게 해주었던 장본인은 바로 아내 캐롤 롬바드였고,

그는 자신의 사랑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기 위해서 죽은 아내의 사고지점을 찾아갔고, 그녀의 유류품을 찾아냈던 겁니다.

이런 클라크 게이블의 숨겨졌던 사연을 알고나니, 정말 너무도 감동적이어서 나도 모르게 눈에 눈물이 글썽거리게 됩니다.

실제로 아내 캐롤 롬바트가 사망했던 그 시기에 클라크 게이블은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이나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습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캐롤 롬바트가 사망한 후, 혼자서 두문불출하거나, 공군에 자원입대한 2년을 빼고는 혼자서 오랫동안 은둔생활을 해왔는데, 무려 10년 동안이나 영화에 출연하지않고 혼자 지냈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내가 사망한 지 11년이 지난 1953년도에야 비로서 영화 ‘모감보’에 출연해서 배우활동을 다시 재개해나갔답니다.

허리우드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그가 무려 13년 동안이나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는 것은, 그가 부인 캐롤 롬바드를 잃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를 충분히 가늠할 수 있는 부분입니다.

그리고 클라크 게이블에 대한 또다른 일화가 전해지고 있는데요. 클라크 게이블은 실제로 1942년부터 43년도까지 조종사로서 공군기를 몰고 독일과의 교전에 투입되었습니다.

클라크 게이블이 공군기를 몰고서 독일공습에 투입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부하들에게 클라크 게이블을 생포해오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아돌프 히틀러는 원래 허리우드영화를 엄청 좋아하는 허리우드영화 광팬이었답니다.

히틀러의 서재에는 커다란 영화스크린이 설치되어 있고, 부하들이 수백편의 허리웃영화 필름들을 구해서 그에게 헌납했고, 그는 종종 허리우드영화들을 즐겨 보았다고 합니다.

사실 히틀러는 30~40년대 허리우드스타인 클라크 게이블을 무척 좋아했고, 그의 광팬이었다고 합니다. 특히 히틀러는 클라크 게이블의 부모가 독일계라는 이유로 더욱 더 그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클라크 게이블이 독일과의 교전에 참전했다는 소식을 들은 히틀러는 부하들에게 무조건 그를 체포해 데려올 것을 지시했습니다.

그는 클라크 게이블 체포에 5,000달러의 현상금까지 걸고서, 그의 생포를 간절히 원했답니다.

그는 개인영화관에서 클라크 게이블의 영화를 보면서 큰 희열을 느꼈던 것처럼, 클라크 게이블의 실제모습을 보기를 간절히 원했던 겁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독일폭격에 계속 참여했고, 공군기를 몰고서 전투 중에 죽을뻔한 위기도 여러번 겪었지만, 그 때마다 기적처럼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히틀러는 부하들에게 클라크 게이블을 절대로 죽여서도 안되고, 상처를 내서도 안되며, 오직 성한 상태로 생포해오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합니다.

이것을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지만, 절대독재자 아돌프 히틀러의 준엄한 명령이므로 부하들은 따를 수밖에 없었습니다.

클라크 게이블이 독일과의 교전에서 여러번 죽을 위기를 겪었음에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히틀러의 이같은 황당한 명령 때문이 아닐까 사료됩니다.

이같은 아돌프 히틀러의 괴팍하고 황당한 취향 때문에 클라크 게이블이 2차대전에서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정말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치달으면서 독일의 패색이 짙어지자, 히틀러는 또다른 명령을 내리는데, 이번에는 히틀러는 클라크 게이블을 생포할 수 없다면, 차라리 그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클라크 게이블을 생포하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지니까, 차라리 그의 시체라도 건져볼 생각이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클라크 게이블은 독일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전공을 세워서 소령까지 진급하는 쾌거를 이루어냅니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미국정부는 클라크 게이블에게 귀환명령을 내렸고, 클라크 게이블은 훈장 5개를 받고 명예롭게 예편하게 됩니다.

◆ 클라크 게이블의 사망, 사망원인

마침내 전장터에서 돌아온 클라크 게이블은 자신이 찾아낸 캐롤 롬바드의 스카프를 자신이 죽을 때 함께 묻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합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55년도에 이혼 경력이 있는 39세의 케이 윌리엄스와 네 번째결혼을 하면서 안정을 되찾았는데, 이 시기에는 영화제작과 배우로 참여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벌여나갑니다.

그런데, 클라크 게이블은 원래 술과 담배를 엄청 좋아해서 사실 오랫동안 심장병과 혈관질환을 앓아왔고, 50년대 후반부터 증세가 매우 나빠져서 LA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게된답니다.

그리고 클라크 케이블은 1960년 11월 심장질환이 더욱 악화된 상태에서 심근경색이 발생해서 LA병원에서 60세 나이에 안타깝게 사망하고 맙니다.

클라크 게이블은 생전의 유언대로 자신의 세번째부인 캐롤 롬바드의 무덤 옆에 안치되었고, 그의 무덤에는 역시 캐롤 롬바드의 스카프도 함께 안장되었다고 합니다.

허리우드영화계에서 30, 40년대에 최고 인기스타로 군림했던 클라크 게이블이 부인 캐롤 롬바트가 사망하자, 군대에 자원입대해서 공군조종사로 활동했던 이유가 부인의 유류품을 찾기 위해서였다고 하니, 그가 부인 캐롤 롬바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를 충분히 가늠해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자신에게 생애 처음으로 진정한 사랑을 느끼게해준 캐롤 롬바트를 잊지못해 그녀의 추락지점까지 찾아가서 그녀의 흔적을 찾아낸 클라크 게이블의 지고지순한 사랑에 뭉클한 감동을 느끼게 된답니다.

클라크 게이블과 캐롤 롬바드의 사랑은 역사에 남을만한 정말 아름다운 사랑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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